에런 소킨의 <웨스트윙> 시즌 1에 나오는 이야기다. 흑인 소년이 대통령 보좌관 인턴의 후보로 올랐다. 성실하고, 똑똑하다. 집안을 부양해야 하는 임무도 있으니 소년에게도 좋은 일자리다. 그러나 보좌관들은 망설인다. 백인 대통령의 시중을 들어야만 하는 자리에, 흑인 소년을 쓰는 것이 옳을까? 흑인의 표를 얻어야 하며 1기 집권을 하고 있는 민주당 정부는 잠깐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웨스트윙> 은 1990년 말에 방영이 되었다.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 Matter)는 여전히 의미 있는 외침이다. 블랙 아이드 피스의 윌 아이엠(Will.I.Am)은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All lives matter)를 긍정하면서, 그러나 지금은 흑인의 생명이 소중함을 외칠 때라고 말했다. 자신의 노래를 커버(Cover) 하는 버스킹 현장에 우연히 나타나, 이 말을 마친 그에게 사람들(People) 은 환호했다.
그러니까 영화 <히든 피겨스>로부터 60년 가까이 지나서 - 십간십이지, 육십갑자를 지나서 - 일어난 일들이다. 여전히 많은 편견이 남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백 년 전으로 돌려보면 흑인 여성이 박물관에 전시되던 시절을 지나, 워싱턴에 흑인 역사문화박물관이 세워지는 시대가 된 것도 사실이다. 이걸로 충분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바람직함, 당위를 위한 변화는 아직 여러 세대를 걸쳐 가면서 진행된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느린 것이 답답한 것은 맞지만, 우리는 발전하고 진화하고 있다.
다시- 반대로 1960년대 미국에서 흑인과 여성은 살기 좋은 조건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 속 세 히어로(Hero)는 세상의 편견에 짱돌을 던졌다.
캐서린은 합리적 권위를 활용하였다. NASA의 권위를 담당하는 상사의 마음에 들었고, 그로 인해 유색인종 전용(Colored only) 전기 포트, 화장실을 없앨 수 있었다. 그녀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기존의 권력의 정점을 바꾸면서 체제를 바꿀 수 있었다.
체제는 견고하며, 체제 자체로는 변화하지 않는다. 결국 개인의 집합이니까. 그러나 한편으로 개인은 내가 바뀌어봤자 체제는 변화하지 않는다고 변명할 수 있다. 때문에 체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개인을 타깃 하여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캐서린의 상사의 행위를 맘에 들어하는 백인 남성 연구원들의 비중은 얼마나 될까. 그러나 한 번 없어진 유색인종 전용 화장실은 다시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변화를 위해 우선적으로 설득해야 할 대상은 그 변화를 강제할 수 있는 특정 소수 집단일 수 있다.
매리 잭슨은 그러한 사람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권위자, 기존의 권력의 이익과 자신의 이익을 합치시킨다. 캐러신과 유사하지만, 주도적으로 소송을 걸 정도의 행동력이 다른 지점이 있다. 또 캐서린의 보스의 경우에는 캐서린의 능력을 탐내었던 부분이 핵심이었지만, 매리 잭슨의 경우 주 법원 판사의 개인의 이익의 방향을 자신의 이익과 함께 갈 수 있도록 어젠다를 바꾸었다.
이때 매리 잭슨은 당시의 시대상과, 상대방의 처지를 이용한다. '처음'을 경쟁하는 1960년대, 체제 경쟁, 노선 경쟁, 냉전의 시대. 최초로 우주로 가는 미국인을 찾아가는 분위기. 그리고 이제 할 만큼 해버린 주 법원 판사의 상태의 해결책을 제시하고, 거기에 자신의 이익을 덤으로 보탠다. 어떤 당위를 위한 변화는 현재에 밀착되어 있어야 한다. 특히, 그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사람들의 변화에. 그 변화에 직접적으로 이득을 보는 집단의 변화 만으로 당위가 형성되기는 어렵다. 아직 사람들은 그러한 당위와 자신의 본성과 기존 체제의 관성을 섞에 미래를 그려내는 능력이 전반적으로 부족하다.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교묘한 이익을 던져주는 설계가 필요하다.
도로시는 가장 중요한 변화의 전략을 취한다. 그녀는 연대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 명확하게 영화에서 표시해주지 않아서 아쉬웠다. 어쨌든 그 전략은 매우 유효하다. 데렉 시 버스의 테드 강연 <운동이 시작되는 방법> 이 살짝 떠올랐다. 그녀는 우선 자신의 지지 세력을 만들었다. 같은 아픔을 공감하는 집단에서 봉사하는 사람이었으며, 또한 미래를 관측하고 거기에 대응하는 사람이었다. IBM의 메인프레임이 도입되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고, 자신 -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그 변화가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하였다. 결국 당시 메인프레임을 돌리는 언어 '포트란'을 익히고, 천공카드를 다루고 메인 프레임을 다루는 방법을 익힌다.
중요한 것은 이 변화가 개인에게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는 자신의 발견을, 지혜와 지식을 자신의 집단에게 공유한다. 모두가 함께 가야 한다며 기존 세력의 타협 제안을 뿌리친다. 이 지점은 매우 위대하다. 개인의 승리를 집단의 승리로 전환하는 데에 개인의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은 위험한 상황이긴 하지만. 어쨌든 일어난 변화의 순간 자체는 칭송해야 마땅하리라.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녀는 힘을 획득하고 기존 세력에 화합 제의를 거래를 통해 받아들인다. 새로운 당위의 등장은, 기존 체제의 관성에 젖은 이들에게는 폭력적이다. (그 당위가 실제로 올바른가 와는 전혀 관계없다.) 진정한 당위라면 기존 세력들까지도 그 울타리 안에 품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무임승차자'를 만들어서는 변화의 동력이 사라지게 되며, 기존 세력의 불만까지도 야기할 수 있다. 때문에 적절한 거래와 변화를 만들어 내야 한다. 도로시는 흑인 여성 최초의 관리직으로 올라가면서 백인 여성들 까지 이 운동의 추종자로 만들 수 있었다. ㅍㅍㅅㅅ 의 <히든 피겨스> 관련 리뷰에 나온 것처럼 이 영화의 한 측면이 '인간 vs 기계'라고 하면, 도로시는 흑인 vs 백인의 구도를 '여 vs 남'과 '사람 vs 기계'로 성공적으로 치환한 것처럼 보인다.
개인적으로 여기에서 딜레마를 좀 느꼈다. 결국은 '뛰어난 개인' 이 필요하다. 도로시, 캐서린, 매리의 성공적인 변화 전략은 개인적인 뛰어남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도로시는 메인 프레임 매뉴얼과 포트란 언어 입문서를 가지고 기존의 남자 엔지니어를 뛰어넘었다.(실제로도 그랬을지는 모르겠다.) 매리는 기존의 NASA 엔지니어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이며, 주 법원 판사를 설득하는 논리를 스스로 구성할 수 있는 지식인이다. 캐서린이야 뭐, 당시의 초고가 메인프레임의 계산을 검산할 정도의 천재이고.
고로 뛰어난 개인이 나타나기 힘든 집단에서의 변화 유도는 힘들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교육 기회의 평등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충분조건은 안되더라도, 필요조건에는 이런 것들이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대중에게 정보가 가는 것을 독재자들이 그렇게 두려워했던가, 생각해본다.
영화의 시선은 아쉽게도 1960년대의 문제만을 지적할 뿐이다. 그것이 도덕적인 비난을 받을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쩌면 반동적이다. 과거의 문제를 보여주며 지금을 미화하는 것은 지금의 체제를 고착화시키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급진성을 내려놓았기에 가질 수 있는 매력을 가졌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그리 부담스럽지 않게 볼 수 있으며, 과거의 영웅들을 조명하여 새로운 영웅에게 힘을 줄 수도 있다. 적어도 과격성에 과민한 반응을 보이는 중간층에게는 유효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폭력, 급진 투쟁 노선에 대한 경계를 어느 정도 보여준 의도성에 대해서는 걱정의 시선을 보낼 수밖에 없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모습 만으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인지, 저 길 말고도 다른 길이 있다고 말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확실한 것은 변화에는 파격이 필요하단 점이다. 파격이 생겨야 틈새가 생기고, 그 틈새로 제3의 무언가가 시도될 가능성이 있다. 기존의 공고한 체제 속에서는 위 세 전략이 통할까? 일단 노예 해방은 되었어야 가능한 것이다. 물론 유물론의 관점에서 경제의 변화 속에서 노예를 해방해야 한다는 물결이 있어야 했을 수도 있지만. 그 흐름을 타고 첫 번째 리더가 있어야 첫 번째 추종자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니까.
당위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 매력적이어야 한다. 정치적인 싸움이란, 뺄셈보다는 덧셈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차별은 정치적이다. 한 때 사회적으로 큰 문제라며 등장한 '왕따' 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주류 집단과 다른 집단에 대한 차별, 그것에 대한 억압 기제. 방관하는 다수의 사람들. 이것은 권력 투쟁이다.
왕따 이론에서는 가해자와 피해자, 동조자 그리고 방어자가 등장한다. 왕따라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는 동조자를 방어자로, 혹은 나의 동조자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피해자가 아닌, 이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방어자가 외부에서 등장하거나, 나 자신의 힘을 길러서 판도를 바꾸어야 한다. 그것을 폭력으로 해결할 것이 아니라면 - 누군가를 왕따 시키는 것보다 더 매력적인 권력 구조를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차별보다 더 재미있는 무언가를 만들어야 방어자가 더 등장하고, 내 동조자가 나타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스마트 이즈 더 뉴 섹시(Smart is the new sexy)를 외치던 <빅뱅이론>이 떠오른다. 캐서린의 똑똑함은 차별을 넘어 다른 사람을 감화시켰다. 우주비행사까지도. (세상에, WASP 에 해군 장교인데! 1960년대에!) 반면에 우리 쉘든 쿠퍼(빅뱅이론 등장인물, 짐 파슨스)는 영화 말미에서야 어느 정도 인정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영화는 그를 확실한 악역으로 그렸어야 했을까? 글세. 그는 체제의 순응 자일뿐일지도. 해리슨(NASA Space Task Group 부장)이 방어자로 등장했을 때, 그는 새로운 체제에 잘 순응하는 동조자가 된 모습을 보여준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든다.
아쉽게도 개인 인격체로 이 문제에서 자유로운 사람도 없지만, 크게 '잘못했다' 고 말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분명히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각 개인이 사회의 암묵적 룰을 어기라고 요구하기는 어려움이 있다. 왕따 사회의 동조자들은 소시민들이며, 그것은 가치 판단의 대상이라고 쉽사리 말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당위가 오기 전까지는 평생을 강요받고 학습한 '체제의 관성' 속에 사는 것뿐이다.
때문에 다수를 이을 수 있는 무언가, 그들을 당기는 매력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나 몇몇 운동들은 그런 모습을 많이 잃어가는 것 같다. 급진성, 과격함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는 한계에 부딪히게 되지 않을까. 말콤 X 에 더불어 마틴 루터 킹도 나와야 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2016년 겨울, 버스 위로 올라간 사람에게 내려와를 외치고 평화 시위를 강요하는 '다수' 가 만들어졌을 때, 사회는 변한다. 그 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는 모습이 더 세련되고 멋지다고 생각한다.
위대한 이들은 강철처럼 뜨거운 불 속에서 제련되고, 때로 그 불을 댕기는 것은 일반인의 특권이다. 어떤 영역에서는 그 특권을 가진 사람들의 불이 아직 댕겨지지 않았단 생각이 든다. 환경운동, 페미니즘 등등. 어쩌면 캐서린이 바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좋다고 말하면서 그런 일을 '여자'가 해요 라고 하는 멍청한 대령. 엄마도 우주에 가는 거야라고 묻는 자식들의 말에서 나온 것일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파격을 만들고, 그 파격 속으로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런 사람들의 매력을 찾아, 널리 퍼뜨려야겠지. 이 또한 변화의 한 방법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이런 이야기를 쫒고, 퍼뜨려야 할 테니, 영화는 그것만으로 제 역할은 다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