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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Apr 19. 2017

<중국의 미래> 리뷰:
편견을 넘어

마르테 셰르 갈퉁 , 스티그 스텐슬리 지음

여는 말: 변명


이 글은 아래 재료들을 가지고,  2017년 1월에서 4월 초입까지 내가 겪은 중국에 대한 인식 변화에 대한 글입니다. 기본적으로는 마르테 셰르 갈퉁과 스티그 스텐슬리가 지은 <49가지 단서로 예측한 중국의 미래> (이하 책)에 대한 서평에 가까운 글이기도 합니다. 


나름 중국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3개월간 중국 관련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면서 제가 중국에 관해 아는 것은 한 개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니 이 글을 통해 중국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을 생각은 버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하지만 중국에 대해 이제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고자 노력하시는 분께는 도움이 될 수 있는 정보를 최대한 담아보고자 노력하며 썼습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이 없는 분야네요. 그래서 이렇게 변명으로 글을 시작해 봅니다. 


글의 주재료
<49가지 단서로 예측한 중국의 미래>
마르테 셰르 갈퉁 , 스티그 스텐슬리 지음

글의 부재료
<아시아의 힘><야망의 시대><중국, 그래도 중국>을 읽고 한 트레바리 1701 시즌 쯍쯍 에서의 토론
중국 입문 (2010-2학기, 연세대학교, 연계전공) 보고서  <武俠, 왕도와 패도 사이에서>
<마오와 그 이후의 중국 1,2> <앵그리 차이나> <중국의 내일을 묻다> <중국의 외교전략과 국제질서>
<전환시대의 중국의 사회계층> 등




起: 편견의 발견


<49가지 단서로 예측한 중국의 미래> (이하 책)은 쉽다. 중국을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따라올 수 있는 책이다. 49가지의 주제 하나하나에 큰 힘을 쏟지 않은 것은 장점이자, 아쉬운 부분이다. 그 주제를 저자들은 '신화'라고 이름 붙였다. 사람들이 중국에 대해 오해하거나, 환상을 가지고 있는 49가지의 사실들. 저자들은 사람들이 흔히 잘못 알고 있는 그 49가지 사실들을 반증한다. 


49가지의 '신화(Myth)'는 결국 '편견'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중국, 중국 사람을 대할 때 가지게 되는 편견들. 이 책은 그 편견을 발견하고, 부수려고 노력하는 책이다. 하지만 상술한 것처럼, 하나하나의 '신화'에 큰 힘을 쏟아서 서술하지는 않았다. 많은 참고문헌을 통해 깊은 검증을 했지만, 한 주제를 꿰뚫는 논리는 종종 빈약했다. 때문에 편견을 완전히 부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될 것 같진 않다. 아니, 지금의 편견을 부수고 나면 새로운 편견이 생겨날 수 있는 구조의 서술이었다. 


때문에 이 책을 접할 때에는 '편견'의 관점에서, 그것을 발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읽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중국'과 '편견'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 책을 읽으면 재밌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럼 편견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우리는 왜 이 책이 지적하는 '편견'들을 가지게 되었단 말인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으로 모든 게 설명이 될까? 


중국에 대한 편견들. 위생관념이 투철하지 않다게으르다. 화교에 대한 생각이나 이런 것들이 한국에도 충분히 퍼져 있다. 이 중 대다수는 개발 중인 국가(Developing country)에서는 발생 가능한 것들에 대한 시각이며, 한국 사회도 십수 년 전에 겪던 내용들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대체로 들어맞을 때도 있지만,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성장하고 있는 나라이며, 경제적인 성장은 사회의 진보를 야기한다. 때문에 대다수의 이런 편견들은 이제는 의미 없는 것들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책에서는 나라 별로 다르지만 서구권 중심의 편견에 대해서 풀어놓는다. 90년대부터 널리 퍼진 중국에 대한 인상이 복합적으로 소개되며, 그것의 허구성을 파헤친다. 물론 책의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논증이 날카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몇몇 주제들은 그 주제 하나 만으로 책을 여러 권 적어야 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견이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책이었다. 






承: 편견의 파괴


편견은 차별을 낳는다. 사람은 타인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으며, 자신의 기준에 따라서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 이 색안경은 세상을 사는 데에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 필연적으로 차별을 가져온다. 누적된 편견들이 모여서 '저 사람은 이런 대접을 받아 된다'는 식의 이야기로 흘러가게 된다. EBS에서 실험한, 정장을 입은 남자와 운동복을 입은 남자의 인상 비교 (그리고 실제로 그 둘은 같은 남자) 실험이 기억나는 대목이다. 


이 책은 편견을 파괴하기 위한 책이다. 서문과 다른 평을 보고 미뤄 짐작하면 노르웨이 정부 및 기관들은 류샤오보의 노벨 평화상 수상 이후의 중국의 대응을 보고 겁을 먹은 것 같다. 편견은 대체로 관찰자와 피 관찰자 사이에서 권력관계를 통해 차별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왕왕 있는데, 이번이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한국에서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반응을 보면서 예상을 했다면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편견은 일종의 '기대치' 일 수도 있겠다. 그러니 내가 예상하지 않은 대로의 상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때에 편견은 파괴된다. 쟤가 그런 모습도 있었어? 그러면서 실망하기도 혹은 크게 만족하기도 한다. 이렇듯 편견은 변화를 무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하다. 우리에게. 어쩌면 우리가 바라보는 중국의 모습에 대한 편견들은 근대 이전의 것들 혹은 십수 년 전에 머물러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아무리 세계가 평평해졌다고 한들, 외국의 사정을 모두 따라가기는 어려우니까. 


그럼 편견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을까. 편견을 통한 오해가 파국으로 치닫기 전에 그것을 깨부숴야 하는데, 그 순간이 어디인가. 마케팅에는 진실의 순간(Moment of truth)이라는 말이 있다. 고객과 제품, 서비스가 맞닿는 접점에서 실제로 브랜딩의 관점에서의 '진실' 이 드러난다는 말이다. 이건 '계기'를 말한다. 어떤 계기를 통해서 우리는 변한다. 계기는- 예를 들어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가 민주주의를 외치던 투사를 보수 반동으로 이끌기도 하고, 특정 사건에 연루되는 것은 현금을 좇던 세법 전문 변호사를 인권 변호사로 이끌기도 한다. 


<야망의 시대>(에번 오스노스 저)가 떠오른다. 하지만 충분한 계기가 되었다. 중국은 13억의 덩어리로 보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것을 잘 지적해 주었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 야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편견의 파괴는 지식의 확장을 의미한다. 편견은 새장 속의 내 지식을 말한다. 내 편협한 시각으로 보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줄차탁마의 과정이다. 안 밖. 외부의 충격과 나의 각성이 필요하다. 


편견을 파괴할 필요가 있다면 말이다. 




: 편견의 역설


편견의 파괴는 다른 말로는 새로운 편견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일 수도 있다. '편견'이라는 것을 모두 벗겨낼 수 없다면 우리는 파란색 색안경에서 붉은색 색안경을 바꿔 쓰는 정도로만 '편견'을 이겨냈다고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마오쩌둥'을 단순한 학살자가 아니다!라고만 배우는 것은 그저 하나의 인식의 층을 더하는 것일 뿐이라는 이야기이다. 편견을 최대한 배제한 상태로 가려면, 사람을 판단하는 틀 자체를 바꿔야 하지만, 그것은 사람에게 바라기엔 너무 어려운 일이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가짜 뉴스(Fake News)' 판별 실험에서 대다수가 실패했다는 기사가 떠오른다. 우리는 인식하고자 하는 것을 사실 그 자체보다 더 중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세상을 관조하는 눈을 기른다는 것은 의미 없다. 덩어리로 우리는 서로의 편견을 좁혀 가면서 동일한 편견을 가지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편견의 파괴가 외부의 충격과 내 각성으로 이뤄지지만, 편견을 지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결국 대상에 대한 편견을 부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대상과의 교류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 책은, 그 부분에 있어서는 아쉬운 점을 많이 남길 수밖에 없었다. 언급한 <야망의 시대>에 비해서, 이 책은 '중국' 밖의 중국에 대한 시선을 모아, 쉽게 가질 수밖에 없었던 '시선' 들만 교정할 뿐이다. 


상술한 것처럼 책의 저자들도 기존의 편견을 바꾸고자 한 것은 자신들을 위한 것. 필요에 의한 것일 뿐이다. 고양이인 줄 알았던 대상이 호랑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다시 보기 위한 과정으로만 보인다. 이렇게 해서는 우리는 완벽한 상호교류의 장으로 가기는커녕 서로를 이용하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 고민이 된다.(물론 이 조차 사람에 대한 비관적인 편견이 반영된 견해이다.) 


어차피 편견은 존재한다. 편견의 파괴의 순간에 어떻게 할 것인가 중요하지. 편견 없이 산다는 것은 완벽하게 정치적으로 올바르며,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어느 쪽으로도 편향되지 않은 글과 같다. 이상향일 수 있지만(그것도 불확실하다만) 그것은 인식의 저편에 있다. 우리는 편견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다. 편견이 없는 삶은 너무나 비효율적이다. 우리는 어쩌면 판단을 어떻게 더 '빠르고' '잘' 하는 존재가 되느냐의 경쟁을 하는 진화의 단계에 왔는데, 편견이 없이는 '빠르게' 조건을 달성하지 못한다. 


교과서의 단편적으로 나열된 '진실'이라 주장하는 것들에 반기를 드는 것은 좋지만. 그렇게 시험 점수를 잘 받는 것은 쉽지가 않다. 그렇지 않은 길이 더 나은 교육법임을 주장할 수는 있지만, 기껏 한 학년에 수십만의 수준에서도 그것을 처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 이렇게나 발전한 사회에서 말이다. 객관식을 벗어날 수 있지 않는 이상에야. 우리는 편견을 강요할 수밖에 없다.






: 편견을 넘어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에서는 최근 세계적인 불평등 완화 추세는 중국의 성장에 기댄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13억이 넘는 축의 움직임은 전체를 변화시킨다. 비슷하게, 중국을 배운다는 것은. 하나의 지식 체계를 쌓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한다. 십몇억의 사람과 그 이야기들은 수십억의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때문에 우리는 중국을 알아내야만 한다. 어쩌면 중국을 빠르게 이해하기 위한 지식들을 쌓아 나가야 한다. 어떤 책. 어떤 기사에서, 혹은 드라마를 보거나 역사공부를 하면서. 이 지구를 공유하는 십수 퍼센트의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지식들은 변화하는 세상에서, 우리에게 편견이 되어 다가오게 될 것이다. 우리 중 누구도 13억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다. 우리는 편견 때문에 계약을 놓치기도 하고, 관광객을 잃을 수도 있고 또 어느 날은 주먹다툼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편견 그 자체는 잘못이 없다. 편견으로 일어난 '무언가' 가 문제이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쉽지만, 편견에 가치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또한 한편으론 편견과 '무언가'를 연결시키지 않는 개인의 노력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전라도 사람은 배신을 잘한다라는 이상한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저 문장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이 사람은 그 편견을 쌓는 것보다 더 많은 경험을 해야만 했다.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지만, 어느샌가 주입된 편견을 이기기 위해서는 한참을 노력해야만 했다. 또 어떤 이는 흑인은 더럽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난, 이 친구에게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외부에서 편견을 의도를 가지고 부수는 것은 마찬가지로 어렵다. 


그러나 그럼에도, 편견 그 자체만으로는 '죄'는 아니다. 하지만 저 편견을 가지고 조모임(팀플) 하는 사람이 한 두어 번 무임승차를 했는데 거 봐 역시 전라도는... 이라거나, 야근을 너무 하며 씻지 못한 흑인에게서 땀냄새가 난다고 휴 흑인은...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고 그것을 입 밖으로 내뱉는 것은 잘못이다. 편견이 필연적으로 낳게 되는 오해, 그리고 차별.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기반으로 사고하지만 그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전제는 그래서 중요하다. 


때문에 중국이라는 거대한 '타자'와 소통하며 우리는 개인이 쌓아나가는 편견을 수없이 깨부수며 온전한 이해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다가가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적 회의주의를 가지고, 어쩌면 조금은 피곤한 삶을 사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 경험으로 가짜 뉴스에 속는 일도 줄어들겠지. 어떨 때에는 온전한 통계적 진실들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법도 배우게 될 것이다. 이건 과학적 사고, 데이터 싱킹에 가까울 것이다. 


또, 중국을 배우면서 우리는 세상을 배우고 또, 우리를 배운다. <아시아의 힘>에서는 중국의 성장 공식이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한다. 유럽의 여행지들은 일본인, 한국인 그리고 중국인을 순서대로 맞이하고 있다. <야망의 시대>에서는 서로 다른 생각을 지는 중국인들을 보여준다. 그 모습은 중국이 것일까, 그저 사람의 것일까. 새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현인도, 빵집의 김 사장과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살아가 수 없다. 우리는 별을 좇을 수 있는 눈을 가졌지만, 달에도 닿지 못하는 신장을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 시야에 서는, 거인의 어깨가 아닌 내 두 발로 디딘 땅 위에서 중국이나, 일본이나 캄보디아나 에티오피아의 사람들은 내가 아니지만 우리가 된다.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의 역사를 배우는 것은 재미있다. 하지만 중국을 배운다는 것은 미래 세상의 거대한 축을 배우는 것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미래가 어떻게 흘러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때문에 언제나 맑은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에 글을 적기 시작했다. 꽤 오랜 시간 구상했지만 마음에 드는 퀄리티가 안 나왔지만, 괜찮은 마무리 문장이 생각나, 그것으로 끝을 내보고자 한다. 


중국을 배우면서 우리는 편견을 뛰어넘을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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