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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Apr 24. 2017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 리뷰

브랑코 밀라노비치 저

평평한 세계에 드리운 그늘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는 평평해졌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캘리포니아에서 디자인한, 중국에서 제조된 아이폰을 한국에서 쓰면서 핀란드 회사의 앱을 구매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그 결제금액의 대다수가 아일랜드와 몇몇 국가를 거쳐서 애플의 계좌에 입금되는 과정을 그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왜 '구글세' 가 대두되는지.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한편, 이민자에 그다지 관대하지 않은 문화권이기에 와 닿지 않을 줄 알았지만 이미 동남아시아, 중국 등의 이민자들이 이 땅에 함께 하고 있음을 우리는 압니다. 


FTA를 찬성하고 반대하는 목소리들이 어우러진 토론을 보고 있으면 멍 때리기 일수이지만, 당장 장바구니가 가벼워지면 기분이 좋습니다. 반면 어떤 회사나 개인은 힘들어지겠지요. 변화는 있어왔고, 도태는 - 이제는 생물학적이지 않은 형태로 자연선택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드는 요즘입니다. 그러니까, 돈을 벌지 못하는 자들은 평평한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 도태종이 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지점이지요. 


어쨌든, 평평해지는 세계 속에서 불평등은 감소했을 것입니다. 전반적인 생활수준도 많이 올라왔겠지요. 선사시대가 지금 보다 더 평등했다고 해서, 우리는 그 시절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고 싶어 하지도 않으니까요. 다만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 (이하 책)을 보면서 세계는 평평해졌을지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우리는 더 불평등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떠올리게 됩니다. 


세계는 평평한데 그 위에 드리운 그늘이 무엇인지는, 아직 정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늘은 존재합니다. 책에서 언급한 것처럼 세계화의 지속에 따라, 세계적인 불평등의 감소 추세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의 중산층은 붕괴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노동조합은 파괴되고, 가장 열악한 곳으로 임금은 흘러가는 와중에 피케티의 말처럼 자본만 돈을 벌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겠습니다. 여성의 사회 참여는 사회적으로 긍정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유지되지 않는 가정 경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됩니다. 


어린아이의 노동을 없앤 지 100년이 흘렀는데, 우리는 노인의 노동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고 있고 - 이제는 그런 일자리마저도 사라질 것임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로봇에게 세금을 물려야 하는가, 기본 소득을 도입해야 하는가 하는 논의들은 이제 지겨울 정도로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게 충분히 널리 퍼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어쨌든 사람들은 100년 뒤를 그리기에는 덜 진화했고, 결정적으로 100년 뒤의 문제는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당장 우리가 유전자의 복제를 위한 생존 기계이고, 유전적 근연도를 따져 이타적으로 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100년은 너무나 멉니다. 




불평등이란 코끼리에 올라탄 우리의 자세


코끼리 등에 사람을 태우기 위해 가혹한 훈련을 시킨다고 합니다. 동물 보호 단체에서는 허용할 리가 없는 일이지요. 하지만 불평등이란 코끼리는, 날 때부터 우리를 등에 올리고 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불평등을 싫어하는 걸까요? 아니 불평등이라는 단어만 싫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유리한 불평등은 대체로 좋아하는 편이니까요. 공정한 거래가 필요하다고 외치는 쪽은 대체로 약자인 경우가 많죠. 그러니 이 코끼리 위에서 우리는 균형을 잡으며 가다가, 조금이라도 내가 앞설 수만 있으면 되는 건 아닐지 궁금합니다. 


다시, 불평등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요. 책에서는 결국 경제적 자산의 분배를 가지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피케티가 지적한 바와 같이 더 이상 노동 소득으로는 자본의 수익률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한 것이 여기에 연계되어 있지요. 때문에 불평등은 심화될 것이라고 전제하니까요. 그럼 우리는 자본의 편중된 분배를 왜 싫어하는 걸까요? 책에서는 중산층이 결국 사회 안전의 중심이라고 말하며, 위로부터의 착취와 수탈, 아래로 더 내려주지 않으려고 하는 속성이 사회를 유지한다는 뉘앙스를 풍깁니다. 즉, 불평등의 상황에서 중산층은 하위 계층에게는 우위에 있는 자들에게는 불평등을 통한 우위를 접하고 있죠. 


작금의 상황에서 불평등을 해소하라고 하는 것은 다시, 피케티나 다른 사람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지금의 상황이 지속될 경우 다수의 중산층의 붕괴와 함께 1:99의 사회가 될 것이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저 우리가 대체로 지금보다는 더 잘살고 싶기 때문에, 너네가 가진 자산을 내놓으라고 외치기 위한 주장의 한 가지에 불과할까요? 어쨌든 정의란 다수의 믿음, 혹은 상상 체계에 가깝다고 말한 유발 하라리가 떠오르는 순간입니다. 


자본주의의 전제에는 불평등이 깔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정보의 비대칭이건 생산 수단의 편중이던 자본이 흘러야 하는 구조이고. 그 흐름 속에 혜택을 받은 자들과 아닌 자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생산수단의 독점을 통한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거나, 그것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공유 경제(Sharing Economy)를 만들 수도 있겠죠. 뭐 둘 모두 잘 모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그냥 그런 게 있었더랬지라는 식으로 언급만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어쨌든 불평등은 이 사회를 구성하는 한 기둥인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불평등이 어느 수준일 때 이 사회라는 건물이 붕괴하지 않고 잘 버텨낼 것인가. 다른 기둥을 몇 가지 살펴보면 될 것 같네요. 사회안전망 (Social Infra)를 볼까요. 불평등이 심해질수록 1:99의 사회, 금권 통치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그 소수는 - 지금도 그렇듯이 - 큰 기간망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게 될 것입니다. 사유지, 사유도로, 사유 발전소 등등. 돈이 있으면 못 만들 것이 없죠. 게다가 농산물 등 특정 인력을 꼭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는데 이제는 로봇이 그것을 대체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99의 돈을 가진 1들은 세금을 낼 이유를 느낄 수 있을까요? 


어쨌든 우리는 DNA 전달자이고, 이 복제자들이 융성하기 위해 계속된 번식을 통한 인구수 유지 혹은 증가가 필요하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 사회를 버텨내는 또 하나의 기둥은요. 이 역시도 1:99 상황에서는 유지됙 어려울 것입니다. 그 상황을 예견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가정들은 이미 재생산의 기능을 보이콧하고 있지요. 유의미할지는 모르겠으나 이해가 되는 대응입니다. 


뭐 이런 식이지요. 불평등을 나쁜 것으로 우리가 그저 머리에 그리기보다는 이 불평등이 야기할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는 것. 책은 불평등이 흐름을 보여주었고, 그를 통해서 이런 이야기를 여럿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예를 들면 대재앙이 있을 때 줄어든 불평등을 우리는,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그것이 필요한 것일까. <재난 불평등>의 저자는 이제 재난도 가난한 곳으로 흐른다고 합니다. 그럴 가능성은 없을까요? 아니면 이제 체제를 흔들 만한 재난은 거의 역사를 뒤로 돌릴 만한 것이 되지 않을까요? <월드워 Z> 같은 거요. 아 네, 그러고 보니 정부에는 그런 사태가 발생할 경우 고학력의 인류의 미래에 도움이 될 사람을 먼저 구할 플랜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 영화에선. 





우리는 왜 경제학을 공부하는가   


우리는 왜 이 책을 읽었을까요? 처음 제가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제목이 섹시해서입니다. 단순히 말하면 전 평등을 지향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재미없는 사회가 되겠지요. 그래도 그러한 사회가 제게 더 맞을 것 같단 상상으로, 이 책을 골라 들었습니다. 


저자는 책에서 몇 번이고 미래에 대한 예측의 어려움을 역설합니다. 왜냐면 그는 통시적으로 과거의 불평등을 조망하여 미래에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책을 쓰기 있었기 때문이죠. 저자의 말처럼 불과 10년이 지나기도 전에 저자 이 거짓말쟁이야!라고 외치게 되는 통계가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참, 그럼 정부, 기업의 돈을 받아 연구한 이 교수는 도대체 어디에 쓸모가 있는 걸까요? 한 미국 대통령이 외팔이 경제학자를 만나고 싶어 했단 말이 떠오르네요. 언제나 그들은 다른 면에는 (on the other hand) 표현을 자주 썼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이 알려주는 것은 있습니다. 특히 이런 거시경제학은 시야를 넓혀주는 것 같습니다. 개인으로는 불평등에 대해서 항상 자신의 위치에 서서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나 보다 더 돈을 잘 버는 친구와 술을 먹고 더치 페이를 하는 것이 옳은가 정도의 담론을 가지고 이야기를 할 수 있겠죠. 


또한 큰 시야에서 이야기를 하면서 우리는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게 될 수 있습니다. '평등' 은 무엇인가. '평등' 은 정말 천부인권일까? 글쎄? 우리의 본성은 '평등'에 가까운 것일까. 모두의 평등이 내게 유리한 '불평등'을 무너뜨릴 때에도 나는 그것을 밀고 나가게 될까? 이런 생각을 여러 그래프와 숫자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뭐, 예를 들어 식민지 시대에 같은 인류를 착취하며 얻은 부가 우리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행복해지게 만들었을까 - 에 대한 것들도 대충 보였던 것 같네요. 



#트레바리 #이콘그린 #1705 

#왜우리는불평등해졌는가 #브랑코밀라노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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