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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min Jul 22. 2017

철들지 않기 위하여

여전히 어른이 될 생각은 없답니다. 

세월호 이후.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다. 하지만 무엇도 하지 못했었다. 일상에 치여서, 회사 생활 한다고. 변명거리만 늘었었다. 개인이 무언가 할 수 있는 기회는 갈수록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렇게 느낀 무력감이 날 보다 더 나태하게 만들었다. 아니, 나태해진 자신에 대한 좋은 핑곗거리가 되어 주었다. 그렇다고 내가 무의미하게 흘러갈 수도 없었다. 눈곱만큼 남은 내 공감 능력이 날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래서 힘들었다. 


수년 전, 아무 것도 모르는 채로 창업을 했었다. 그 때 도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설적으로 내 인생에 포기와 실패가 절반씩 있었기에, 두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실패하고, 포기한다고 절망할 이유가 없었다. 잃을 것이 없으니, 무작정 뛰어둘 수 있었다. 그리고 당연한 실패. 그렇게 취업을 했다. 절망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 능력에 대한 의구심은 커져갔다. 창업을 접고, 취업을 하기 전, 학교에서 수업을 들으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만족할 수 없었다. 남들이 뭐라고 하여도 난 내 능력의 하찮음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한 친구의 진정제, '1년 전의 너와 지금의 너를 비교해보라'는 말도 그리 오래 듣는 약은 아니었다. 조금 나아갔다고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내 능력에 대한 과거의 자만심은 작지 않았다. 그러한 능력에 대한 자만심, 혹은 기대는 결국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짧은 인생 속에서 무엇이라도 이뤄야 한다는 얕은 생각이 기저에 있었다. 왜냐면, 중학교 시절부터 멋 모르는 사회에 대한 불만이 실체화된 것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사람에 대한 불만, 실망과 포기로 이어지는 과정은 불만이 생겨나는 것보다 더 빨랐다. 


그렇기에 나는 더욱더 잘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알고 덤볐다. 개인으로 무언가 이루는 것이 아닌, 일반적인 개인이 가져올 수 있는 변화를 만들기에 내 능력과 의지는 너무, 너무나 낮았다. 결국 내 믿음이 부족해졌음을 의미한다. 어쩌면, 자기계발서 한편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이야기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나와 내 주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여 실패하고, 포기해왔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내가 인지하는 한, 단 한 번도 나를 향한 칭찬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무언가 의미가 있다, 저건 놀리는 거다. 이러한 태도가 쉽게 칭찬에 속아 넘어가지 않게 도와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결국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계속, 그리고 남에 대한 믿음도 앗아가는 결과를 만들었다. 


순진하지 않아진다는 것이 철이 든다는 것일까. 무언가를 순수하게 믿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어른이 되어 버린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때문에 산타 클로스는 있다고 믿자라는 '주민등록증' 상의 어른이, 멋있어 보였다. 나는 저리 순수할 수 없었으니까. 


선한 마음만으로 충분한 세상이 되기엔, 마법검을 휘두르는 왕자가 이 세상에는 없다. 순수한 마음을 지키기 위해 내려온 용사가, 없다. 모두가 상처 입은 영혼들이고, 부둥켜안은 채 살아갈 뿐이다.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혹은 내가 도와주는 누군가가 마법검을 휘두르는 용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내 능력에 대한 자괴감에 빠졌던 것이었다. 상징적인 존재로의 누군가. 영화 <다크나이트>에서 등장한 검사 하비 덴트와 같이. 


그 영화는 죽어 영웅이 되던지, 살아 악당으로 남던지라는 대사로 끝났다. 내가 빠져있던 생각은 <다크나이트>의 마지막과 다르지 않았다. 믿음이 부족하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기다렸다. 나를 진짜 믿어주는 누군가를. 에니메이션 <천원돌파 그렌라간>에 등장한 '카미나'와 같이 "너를 믿는 나를 믿으라, 너를 믿는 너를 믿으라" 말해줄 사람을 기다렸다. 나는 기다렸다. 나에게도 언젠가 불타오를 수 있는 그런 계기가 올 것이라고, 부족한 능력이라도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분명히 올 것이라고.


물론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런 것은 이 세상에, 단연코 없다, 적어도 내게 있을 수 없다. 계기라면, 이미 지나쳤다. 불타오르지 않은 것은 내가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최근에야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 진부한 자기계발서 한 편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은 안된다. 꿈을 머리에 새기고 산다고 이루어질까 보냐. 세상이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는 것도, 부질없다. 그러한 속도로는 언제나 더 나은 미래만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나는 매일 아침, 철들면 지는 것이라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아직 충분히 괴롭지 않았기에 한 말이 아니라, 미래에 대해서 걱정이라는 것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무의식적으로 거울 속 나에게 대답했다. 철들고 싶지 않다가 아니라, 철들면 지는 것이라고. 단순히 순진하게 믿고 싶은 것이 아니라, 믿기 위해 살아가는 삶을, 나도 언젠가부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구세주 신앙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개인이나 신격이 아니라 나 자신과 사회에 대한 믿음이라는 부분이 다를 뿐이니까. 


물론 나는 여전히 우린 모두 망했다, 이 시스템 속에서 소화되고 배설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은, 버리지 않았다. 그럼에도 무언가 해야만 한다고 믿을 뿐이다. 믿고 싶은 것이 아니라, 믿고, 믿기 위해 노력하는 삶이 지금의 나에게는 최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 이상은, 무책임하지만 모르겠다. 내 능력 밖의 일이다. 나 하나,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 주위의 한, 둘이라도 이렇게 변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사회 진보, 기술 진보의 이면에는 다른 퇴보가, 아픔이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알지만, 적극적으로 나는 무시하고 있다. 러다이트 운동은 지금 입장에서 보면 조금 이기적으로만 보이고- 시대의 흐름에서 도태된 사람들로 보이는 측면도 분명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이 삶이었고, 그를 위한 투쟁은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공유경제의 개념이 퍼지는 것을 달갑게 여기면서도 유럽 택시 기사들의 파업을, 구글의 혁신을 사랑하면서도 마운틴뷰에 살던 사람들의 불만을, 아이폰을 동경하면서도 폭스콘을 바라보고 도와주고자 하면서도 무시하고 있다. 


내 믿음은 결국, 그들과 같이 나 자신을 잡아 삼킬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당장, 통일이 내 생에 이루어진다면? 정말로 진보 정권이 들어선다면? 그나마 나를 지탱하던 구 체제의 타이틀들이 제거되고 나면 나는 무엇을 먹고살 수 있을까. 그래도 내 계급, 혹은 내 층위에 반하여- 손에 잡히는 이익을 버리고 미래를 믿고, 철이 들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다칠 것이다. 도태될 것이고. 그러나 지금 시스템의 밖에 존재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고민하고- 모두 함께 가기 위해 달리는 것이, 그러자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저 믿는 것 뿐.


그래서 나는 다시 당신들을, 그대들을 존경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대들이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을 테니까. 더, 내가 멍청해지고 바보같이 남더라도, 그대들을 위하고, 존중해야만 한다. 약은 생각이다. 나는 할 수 없으니, 나는 그대들을 언제까지고 설득할 자신이 없으니 복권을 긁고자 한다. 내가 존경하고 존중하는 그대들 중 누군가가 혁명가가 될 수도, 큰 발명가가 될 수도, 위대한 정치가가 될 수도 있으니까. 아니, 투표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기부하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난, 나 자신을 빼고 모두를, 그대들을 믿기 위해 이제부터 더욱 철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부디, 그대들의 건투를 빈다. 그리고 모든 삶에 경의를 표한다.



초고. 2014. 06.25

퇴고. 2017. 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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