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 고통만 주는 일은 없기를 바라며
‘나 결혼이 하고 싶어졌어’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더라도 그 안에 뜻밖에 좋은 점이 언제나 함께 한다는 진리와 같은 사실은 삶을 살아가는데 꽤나 위안을 준다. 지난해 말 외할머니가 뇌졸증으로 갑자기 돌아가시면서 우리 가족 모두는 슬픔에 빠졌다. 갑자기 쓰러지신 할머니가 홀로 얼마나 아프고 두렵고 외로우셨을지를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너무나 먹먹해 진다. 새벽에 흐느끼는 소리에 놀라 깨보면 굳게 닫힌 화장실 문 뒤에서 마치 어린 아이같이 엉엉 울고 있는 엄마를 발견한다. ‘괜찮아, 미안해 어여자렴’ 슬프게도 시간은 멈추지 않기에 할머니에 대한 아픔도 아주 조금씩 조금씩 희미해져 간다. 대부분의 시간을 나 스스로가 보다 더 ‘잘’ 살기 위해 집중하며 이렇게 글을 쓰는 순간이나 엄마가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말할 때가 아니면 사실 할머니를 거의 떠올리지 않는다. 그렇게 지내오던 어느날 오랜만에 동생과 단 둘이 식사를 하게 되었다. ‘너 아직 비혼 그대로야?’ 작년 어버이날, 동생이 비혼을 선언한 이후 동생에게 결혼은 물론 연애에 대해서도 절대 물어 본 적이 없었다. 동생에 대한 나름의 존중의 태도였다. 그런데 왠지 그 날따라 그 질문이 툭 나와버렸다.
‘음 하고 싶어졌어’
‘응?’ 너무나 뜻밖의 대답에 분명히 듣고도 재차 되물었다. 곧바로 그 이유가 궁금했다. 이유에 대한 대답 역시 예상치 못한 답변이 이어졌다.
‘할머니 장례를 치르면서 가족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어’
할머니는 멀리 가시는 순간까지, 마지막까지 우리들에게 사랑과 깨달음을 주셨다. 장례를 치르며 해외에 살거나 삶에 치여 거의 보지 못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보고 안부를 물을 수 있었고 꽤 자주 보지만 깊은 속내까지는 나눌 수 없었던 친척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며 서로에 대해 좀 더 이해하고 알아갈 수 있었다. 게다가 동생은 결혼에 대한 생각까지 바꾸게 되었다. 앞으로의 삶에도 수많은 고통스러운 일들이 비일비재할 테지만 결국엔 그 안에 숨겨진 좋은 점들을 깨닫게 될 것이다. (물론 슬픔에 체하지 않도록 충분히 아파한 후에) 죽음과 결혼이 같은 시공간에서 공존하는 것처럼, 모든 일에 장단이 있다는 점은 하루하루를 성실히 살아가는 힘이 되며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