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위해 버티고, 아니면 미련 없이 버려라" 미버 퇴사준비법의 요체다. 뜬금없이 퇴사준비라니. 요즘 어디 퇴사 못하는 사람이라도 있나. 퇴사를 밥먹듯이 하는 시대다. 오죽했으면 정부가 퇴사 후 실업수당을 반복적으로 타 먹는 얌체족을 겨냥한 대책 마련에 부심일까.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또 무슨 퇴사 이야기인가. 죽도록 버텨라 하는 존버(존나 버티다의 줄임말)식 말이 더 현실적일지 모른다. 회사를 나오기 직전 한 팀원이 했던 말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팀장님, 요즘 힘드시겠어요?" 상사와의 갈등과 무리한 업무지시, 진척되지 않는 일 상황 등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때 무의식 중에 불쑥 대답이 튀어나왔다. "괜찮아요. 꾸역꾸역 일하기가 내 주특기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돈이 좀 적어도, 가족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졸라도, 일에 비전이 없고 회사 장래가 불안해도, 승진에서 누락되어도, 상사나 부하 직원 동시 눈치 보기에 지쳐도, 개인적으로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상해도, 늘 무탈하게 보이기 위해 애썼다. 어릴 적에도 그랬다. 한번은 큰 바위에서 떨어져 허벅지 안쪽이 심하게 째진 적이 있었다. 피가 철철 흘렀다. 당시 형편에 병원은 갈 엄두도 못 냈고, 집에서 한 일주일을 말도 못 하고 앓아누웠다. 그 후 다 큰 어른 손가락만한 흉터가 평생 큼지막하게 남았다. 미련하고 억척같은 성격은 천상 존버였다. 그러던 어느 순간부터인가 점차 그런 '척'은 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그렇게 살 힘이 없어졌을까. 아니면알을 찢고 다른 세계로 용감히 걸어나갈 새 힘이 생긴 것일까.
'미버'는 "미래를 위한 버티기", "미련 없이 버리기"의 신조어다(출처: 본인). '존버'의 변종, 아니 '스마트 존버' 버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신을 죽여가면서, 미래 비전과 성장 가능성을 말살하면서 무조건 버티는 '존버'는 왠지 서글프기 때문이다. 어차피 직장은 자신을 평생 책임져주지 않는다. 그런 시대는 진즉에 끝났다. IMF 외환위기 때 짐을 싸고 쫓겨나던 선배들, 퇴근 후 자기 가게나 일을 찾아 분주하던 동료 직원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당시 신입사원이던 내게 그런 갑작스러운 변화는 충격이었다. 몇 안 남은 '신의 직장'도 언제 어떻게 사라질지 모른다. 교사는 대기 발령에, 공무원도 명예퇴직, 정원 조정, 성과평가 경쟁 등에 내몰리기는 마찬가지다. 시대가 바뀌었다. 먹여 살릴 가정이나 현실적인 생활 문제는 여전히 고민이다. 하지만 퇴사 시 기본 생활이 안 된다는 법이 있는가. 이건 퇴사하면 살기 어렵다는 자기 무능감의 또 다른 표현일 뿐이다. 퇴사 후 더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직장생활 시 항상 '한칼' 자기만의 필살기를 갈고닦아 두면 된다. 그게 바로 자신의 비전이자 평생의 직업, 일생 뚜벅뚜벅 걸어갈 경력의 대로다. 이런 준비가 된 사람은 회사 안과 밖에서 마찬가지로 빛난다. 자신의 잠재력을 항상 폭발시키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에게 밥그릇으로서의 회사는 미련이 없다. 세상 어디나 자기 밥이라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회사 안에 있을 때 밖에서도 통할만한 능력을 길러야 한다. 자신의 평생직업 비전이라는 안경을 끼고 회사 일을 하면 이것이 보인다. 그냥 회사에서 하라는 일만 하는 사람은 결코 보지 못하는 자신만의 경력 길이다. 이것이 있으면 회사 일의 경험과 성취를 통해 미래 자기 평생직업의 성공 여부를 미리 맛본다. 이런 사람에게 직장 안이냐 밖이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평생에 이룰 비전과 과업을 위해 나아가는 길 위에 직장이 있는 것이다. 직장이 그것을 못 받쳐주면 다른 길을 찾으면 된다. 재취업이냐 창업이냐도 상관없다. 무슨 일을 하던지 평생 꿈꾸는 직업적 성취와 진보를 향해 나아가면 된다. 하루하루 궁극적 직업 목표에 더 가까이 갈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자기가 짜 놓은 인생의 시간표대로 목표를 이룰 수 있으면 더없이 좋다.
물론 직장인 연차별로 상황은 조금씩 다르다. 신입 직원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꿈과 적성을 생각할 여유도 없을 수 있다. 하지만 5년 차, 10년 차 직장인은 다르다. 직장 안이나 밖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책임질 일이 늘어난다. 직장 초기라고 적성과 꿈을 무시한 채 무작정 현실에 맞춰 버틸 필요는 없다. 직장 연차와 상관없이 '미버'는 가능하다. 자신의 적성과 진짜 원하는 것을 찾고 준비하면 되기 때문이다.
'존버' 보다 '미버'를 택한 어느 퇴사자 이야기
'미버'에 눈뜨다.
직장 초년생 1년 차부터 '미버'로 살았다. 그것도 고졸 직장인이었다. 고등학생 3학년 때부터 산업현장에 나가 일했다. 회사는 국내 최대의 대기업이었다. 직장에서 1년 정도 정신없이 일하고 나서 알았다.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큰 조직 시스템 속에서 도구화되어가는 자신과 단조로운 일상에 지쳐갔다. '존버'로 버티기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 시기 우연히 국제화 관련 책을 보고 세계를 무대로 일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이때부터 미래를 위해 버티는 '미버'의 삶이 시작되었다.
'미버' 전략이 먹히다.
직장 초기 '미버'로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시작했다.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 퇴근 후 외국어 학원을 다닌 것이다. 어학에 소질이 있었는지 외국어 학습이 재밌었다. 하나 배워서 바로 써먹을 수 있는 것도 좋았다. 기술분야는 연구원 정도 수준이 안 되면 자신만의 뭔가를 만들어내는 게 어려울 것 같았다. 적성도 그렇지만 비전이 별로 없어 보였다. 시간이 갈수록 계속 배우고 성장하는 일이 아니었다. 회사 안에서 익힌 일을 밖에서도 써먹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미래 비전과 적성을 찾아 인근 야간 대학에 진학했다. 야간 대학 생활은 그야말로 '미버' 그 자체였다. "미래를 위해 버텼다." 고된 직장생활 후 왕복 4시간 거리의 대학을 하루가 멀다 하고 오고 갔다. (직장 주변에는 원하는 전공의 야간 대학이 없었다.) 주변에서 "길거리에 돈을 뿌리고 다닌다", "미쳤다"라는 소리도 꽤 들었다. 그리고 4년 후 졸업과 동시에 회사를 그만뒀다. "지금 회사보다 더 좋은 직장 구하기 어려울 거다"는 주변의 우려도 많았지만 '미버'를 택했다. "미련 없이 버렸다". 그리고 유학을 떠났다. 전공을 더 공부하기 위해서다. 힘들 게 공부한 4년 동안의 노력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IMF 시절 5년의 첫 직장생활은 '존버'로 시작해 '미버'로 끝났다.
경력 전환의 대성공, 진정한 '미버'를 준비하다.
기술분야에서 국제분야로의 경력 전환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유학 중에도 '미버'로 살았다. 대학원 외국어 레벨 테스트 후 실력 부족으로 못 받아 준다는 것을 겨우 사정해서 들어갔다. "졸업 때 실력이 안 되면, 졸업장을 안 받아도 좋다"라고 버텼다. 거의 매일 숙제로 밤을 새우다시피 했지만 우여곡절 끝에 통역대학원을 잘 마쳤다. 덕분에 늦게 들어간 군대도 통역병으로 복무할 수 있었다. 이후 살던 지역의 지자체 산하 국제 관련 기관에 운 좋게 재취업했다. 첫 번째 직장을 나오며 꿈꿨던 막연한 미래를 현실로 맞이한 것이다. 두 번째 회사에서는 통번역, 국제분야 사업, 경영기획 등 다양한 업무경력을 쌓았다. 이때도 회사를 그만둘까 하는 위기는 많았지만, 매번 비전을 더 구체화하고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가면서 버텼다. 새벽 5~6시 회사에 나가 미래를 위해 시간을 투자했다. 향후 10년을 바라보고 퇴사준비 중장기 계획을 세우고 실천했다. 오직 '미버'로 참고 버텼다.
'미버' 실천가로 서다.
이퇴사 관련 경험이 든든한 자산이 되었다. 20년을 퇴사 준비생으로 10년이 넘게 퇴사 고민으로 몸살 앓으며 매진한 결과였다. 중간중간 작은 성과도 맛봤다. 전직에 성공했고, 2번째 직장에서는 해당 언어 지역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았다. 경영이나 다른 분야 업무도 두루 경험하며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다. '미버'로서 두 번의 직장생활을 통해 스스로 그리는 미래를 하나하나 준비했다. 첫 직장에서는 더 큰 도약의 기회를 만들어 떠났고, 두 번째 직장에서는 성장이 멈출 위기 직전 떠났다. 두 번 다 '미버'로 좋은 직장을 미련 없이 버렸다. 남들이 뭐라 하더라도 가슴 뛰게 하는 평생의 직업 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직장을 떠날지 말지 고민된다면 다시 한번 질문해보아야 한다. "지금 버티는 것이 진정 미래를 위한 것인가? 당장 훌훌 털고 떠나도 미련이 없을 만큼 준비가 됐는가?" 아니라면, 미워도 다시 한번 직장을 붙들 수밖에 없다. 아직 직장을 떠날 때가 아닌 것이다. '존버'에서 '미버'로 스스로를 더 단련해야 한다.
어쩌면 단조로운 일상 속에서 늘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직장 생활의 묘미이자 기본자세다. 어찌 회사 생활이 마냥 좋을 수 있으랴, 괴롭고 하기 싫은 일, 많은 업무량, 갈등과 문제 속에서 헤엄치는 존재가 직장인이다. 하지만 누구나 언젠가는 한번 직장을 나와야 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때까지 품었던 마음이 그 이후 생활을 가른다. 직장 밖 낯선 세계를 만날 때 후회냐 인내냐를 선택하는 기준이 된다. 오늘도 이 마음 중심에 곧게 박힌 '미버'라는 단어를 붙든다. 그것이 오래 변치 않고 여전히 역사하기를 잠잠히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