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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섭 Jan 27. 2022

대기업, 공공기관 20년 퇴사준비생의 최후

미버 퇴사준비법_경력의 쓸모

퇴사 준비를 20년이나 했다고? 직장도 20년 다녔으니 그럼 퇴사 고민만 하다가 회사를 나온 것 아닌가. 약간의 과장은 있지만 완전 뻥은 아니다. 2개의 직장을 다니다 퇴직했는데, 모두 1년 남짓해 심각한 퇴사 위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실제 첫 회사는 그후 4년 장생활 내내 야간 대학을 다니며 퇴사를 벼뤘다. 졸업바로 유학을 거쳐 전공을 바꿨고 이직에 성공했다. 두 번째 회사도 2-3년마다 각기 다른 이유로 퇴사에 이르기까지 장고를 거듭했다. 두 회사 모두 나쁘지 않았던 편이라 그 고민의 정도는 더 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그만둘 이유는 여전히 있었기 때문이다. 조직형 인간이 아닌 탓도 있었지만, 직장 생활의 본질적 한계를 절감한 시간들이었다. 이런 퇴사 고민은 아마 모든 직장인들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얼마나 오래 참고 버티느냐의 차이다. 신입 직원 때 통과의례처럼 거쳐가는 질문이 있다. "이 직장이 과연 나한테 맞는 곳일까." 보통 일한 지 1-2년이 지나면 이런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 정도면 어느 정도 일도 해보고 직장 사정도 알만하기 때문이다. 첫 회사 때도 그랬다. 밤낮없이 1년을 일하고 난 뒤였다. 과연 이 일이 적성에 맞는지 진지하게 돌아보게 됐다. 두 번째 회사에서는 2년 정도 지나자 직장에 미래가 있는지 회의가 들었다.


첫 직장은 대기업 기술직이었다. 신입 티를 막 벗을 무렵부터 뭔가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어가 수학보다 편한 문과 체질이었기 때문이다. 일찍 돈을 벌기 위해 이공계 고등학교로 진학한 것이 화근이었다. 급한 마음에 미처 적성을 살뜰히 챙기지 못한 것이다. 잘 짜여진 조직 시스템도 문제였다. 한 없이 안정적이고 든든했지만, 숨이 턱턱 막혔다. 정해진 반복 업무 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물론 개선 제안 같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제도도 있었다. 하지만 한정된 범위에 목표 건수를 채우는 형식적인 일이 될 때가 많았다. 맡은 업무는 통신 장비를 시험하고 수리하는 일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대세 스마트폰을 탄생시킨 부서와 관련된 일이기도 했다.) 모든 것이 돌고 도는 세상이라지만 같은 일을 무한 반복하다 보면 금세 매너리즘에 빠진다. 또 일은 왜 그리 많은지. 대기업 특성상 실적과 성장은 떼놓을 수 없다. 영업인력들은 새로운 주문을 받기 위해 쉴 새 없이 뛰어다니고, 주문받은 물량을 생산 부서에 밀어 넣기 바쁘다. 생산부서는 주문이 밀리면 납기를 맞추기 위해 밤낮없이 일한다. 연구부서도 시장을 압도할 새로운 제품 개발에 여념이 없다. 조금이나마 경쟁사보다 빠르게 신제품을 출시하기 위해서다. 그 과정에서 설계에 오류가 발생하기라도 하면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생산한 제품을 죄다 수거해 수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일이 바쁘면 회사야 많은 돈을 벌고 성과급 잔치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럼 조직에서 일하는 각 개인은 어떤가. 잔업에 특근에 어떤 때는 연장 근무로 버는 돈이 정규 월급을 넘어선다. 하지만 자신의 발전 가능성은 점차 쪼그라든다. 회사 일 외에 자기 미래를 위해 쓸 시간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일 경험이 10년, 20년 쌓이면 뭔가 달라지는 것이 있을까. 그것이 자신만의 경험적 자산이 될 수 있을까. 직장을 나와서도 쓸모가 있을까. 답하기 어려웠다. 이전 직장에서는 프로젝트를 주도하는 선임 연구원 정도나 되어야 '자신만의 무엇'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회사의 부속품처럼 조직의 한 가지 기능을 담당하며 소모되어 갈 뿐이었다. 실제 선배들의 경우만 봐도 그랬다. 회사를 나갈 때, 업무 경력을 살려 직업을 얻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주로 카페나 음식점, 취미를 살린 가게 등을 하거나, 겨우 잘 되면 외주업체 관리직을 맡는 정도였다.


두 번째 직장은 지자체 산하 공공기관이었다. 전자공학에서 외국어로 전공을 바꿔 재취업했다. 첫 직장에서 한 퇴사 준비 덕분이었다. 담당 업무는 한 도시의 국제교류를 증진하는 일이었다. 해외 도시와 교류, 거주 외국인 지원, 시민 참여프로그램 마련 등 업무 폭도 넓었다. 사업 기획부터 추진까지 재량권도 많았다. 아직 자기 일을 하기까지 부족했던 업무 경험을 쌓기 딱이었다. 기관 설립 멤버로 들어갔는데 초기 인원이 10여명, 나중에도 30여명 밖에 되지 않았다. 이전 대기업에 비하면 참으로 아담한 조직 규모였다. 그런 탓에 공공기관이었지만 조금은 자유롭고 가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일할 수 있었다. 작은 조직으로 열악한 업무 시스템도 장점으로 느껴졌다. 스스로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었다. 새 외국어 전공도 살리고, 직접 발로 뛰며 얻은 경험도 고스란히 자기 재산으로 쌓이는 것 같았다. 이전 직장에서 느껴보지 못한 일하는 보람이 있었다. 사회와 시민을 위해 일한다는 자부심도 컸다. 무엇보다 문과적 감성을 채우고 남을 만큼 사람 냄새가 났다. 거기다 공공기관 안정성과 여유로움은 어떤가. 돈 번다고 이리저리 실적에 치이고, 회사가 망해 일방적으로 해고될 걱정은 덜했다. 문서상 일지는 몰라도 정년이 보장되고 오래 일할 수 있었다. 월급과 복지는 적었지만, 법적으로 제공되는 혜택은 확실히 누렸다. 노는 날은 꼬박꼬박 챙기고, 여직원들은 눈치 보지 않고 맘껏 출산 휴가를 썼다. 참 좋은 점이 많았다. 그럼에도 한계는 있었다.


공공기관의 최대 장점이자 단점은 예산이다. 국가나 지방 정부 등의 지원금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자칫 돈을 대주는 당시 권력의 부역자 노릇하기 십상이다. '윗사람'에 따라 기관의 정책이나 사업이 확 바뀌기 일쑤다. 기관의 정체성이나 중심을 지키기 어렵고 주변 상황에 휘둘릴 때가 많다. 권한 있는 부서나 사람에 잘 보이고 예산 따러 다니는 것이 일이 되기도 한다.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다 보니 보수나 복지 같은 비사업 예산은 '철저한' 감독을 받는다. 또 어떤 때는 공기업 혁신이다 해서 기관 통폐합, 조직개편 등 불안한 일상에 떤다. 물론 공조직이기 때문에 함부로 기관을 없애고 인원을 자를 수는 없겠지만, 공공기관의 미래에도 여전히 불확실성은 있다. 인정받던 자리에서 다른 조직과 합쳐지면서 한직을 떠돌거나, 현장직인 경우 나이가 들면서 하던 일을 계속 감당할 수 있을까 고민에 빠지기도 한다. 승진이나 더 이상 성장할 자리가 없어 하는 일이 시큰둥해질 때도 있다. 앞에서 폼 날지는 몰라도, 개인도 기관도 스스로 독립할 수 없다면 이런 비애를 겪을 수밖에 없다.


공공성이라는 것도 양날의 칼이다. 좋게 말하면 사회 다수의 이익을 위하는 착한 일이 된다. 하지만 나쁘게 말하면, 아는 일부만 이용하고 예산지원에 의존하는 싸구려 서비스를 내놓는 '쉬운 일'이 된다. 흔히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공공 근로 같은 사업을 떠올려보면 된다. 의존적이고 양질의 일자리가 나올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이런 일이 습관이 되면 돈 쓰는 일이 너무 당연해지고 도덕적 해이를 겪기도 한다. 자기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제 연말이 되면 사용 못한 예산을 다 쓰느라 별의별 궁리를 하게 된다. 남은 돈 만큼 다음 해 예산이 깎일까봐서다. 결국 이런 조직은 전반적으로 사업 경쟁력이 떨어지고 '깨어있는 1명'의 개인에 의존하게 된다. 돈 쓰는 것에 길들여진 사람이 밖에 나와 얼마나 제대로 일하고 자기 힘으로 돈을 벌 수 있을까.


바로 이런 점이 걱정인 것이다. 설령 지금 인기 있는 대기업, 공공기관에 다닌다고 해서 마음 놓을 수 없는 이유다. 지금 일하는 좋은 직장이 미래에도 좋은 경력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까딱 잘 못하면 아무리 화려한 경력도 직장 밖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다. 과거 명성이나 실적도, 인맥도 회사 밖에서 그저 허울 좋은 과거에 지나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끊임없는 자기 혁신이 필요하다. 회사 안팎 어디서나 독립적인 직업 생활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다. 이전 대기업 때, 회사의 소모품이 되기 싫었다. 그래서 밖에서도 쓰고 자기 안에 장착할 수 있는 외국어 실력을 쌓았다. 부족한 일 경험을 채우기 위해 재취업했고, 직장 생활 내내 차별적 업무기술을 익히기 위해 몸부림쳤다. 그렇게 20년이란 세월이 흘렸지만 여전히 부족함을 느낀다. 아무리 회사 안 경력이 많아도 퇴사 밖 세상에는 그저 초심자에 불구하기 때문이다. 직장 안 퇴사 준비는 아무리 오래 해도 전문가가 될 수 없다. 결국 직장 내에서 어디서나 알아주는 자기 분야 일인자가 되든지, 직접 부딪히고 깨지며 회사 밖에서도 통하는 실력을 쌓든지 2가지 중 하나를 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신의 경력은 회사 밖 어디를 가서도 더 찬란하게 빛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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