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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섭 Jan 22. 2022

느리게 살기 VS 속도 내는 삶

퇴사라는 광야 학교를 지나는 법_반퇴자의 뉴노멀

퇴직 후 기묘한 동거가 시작됐다. '느리게 살기(슬로 라이프)'와 '속도 내는 삶'이 함께 하는 것이다. 표현 자체도 뭔가 서로 안 맞다. 모순이다. 어찌 이런 일이 가능하고, 또 왜 이 두 개를 다 용납해야 하는가. 그건 바로 스스로 퇴직은 했지만, 아직 할 일이 남은 반퇴자이기 때문이다. 탈직장인, 퇴직자에겐 궁금한 게 많다. 바람직한 퇴직 이후의 삶에 대한 의문이 시시때때로 생긴다. 평생 다니던 직장을 떠나 살아갈 반평생은 참으로 낯설다. 퇴사 후 하고 싶은 일을 잔뜩 적었다. 아직 이루고 싶은 일이 더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완전 새로 시작한다는 말이 맞을지 모르겠다. 직장인 때보다 잘살고 돈도 더 벌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퇴사해서도 일에 쫓기다시피 분주하게 살았다. 모든 게 욕심이었을까. 때론 강박증과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일이 안되면 상실감이 커졌다. 한편 "퇴사해서도 이게 무슨 짓이람." 그냥 편하게 마음 가는 대로 살아보려고도 했다. 놀고 싶으면 놀고, 자고 싶으면 자고, 어디 가고 싶으면 떠나는 식이다. 멍 때리고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도 늘었다. 그러다 보니 삶이 느슨해졌고, 그 빈 공간을 다른 무엇인가가 훅 치고 들어왔다. 나태와 방탕함의 역습이다. 탈직장인에게 그저 노는 것도 쉽지 않다. 이것도 잘하기 위해서는 뭔가 기술이 필요하다.


이 문제를 풀 실타래를 충만한 삶에서 찾았다. 이전에 퇴사하면서 한 선언이다.

세계를 누비며 맘껏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 자유롭고 충만하며 나와 주변 사람들을 만족케 하는 하루, 내가 가는 곳이 길이 되고 직업이 되는 놀라운 일상, 글로벌 노마드를 향한 멋진 인생이 시작되었다!


이게 퇴직 이후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었다. 기쁨과 평안 가운데 목적지를 바라보며 날마다 나아가는 것. 진정으로 자신이 원하는 삶을 위한 여행길에 다시 오르는 것이다. 매일이 가슴 뛰는 소풍 같은 하루를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표를 향해 다시 뛸 필요가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것을 '전속력 전진' 또는 '속도 내기'라고 부른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를 쓴 켄 블랜차드가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비전으로 가슴을 뛰게하라'에서 이렇게 말한다.

'전속력 전진(Full Steam Ahead!)'은 증기선에서 비롯된 표현으로, 대형 선박이 최고의 에너지를 쏟아부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삶에서 '전속력 전진'이라고 하면, 뚜렷한 목적과 의욕을 가지고, 자기가 하는 일의 중요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자신의 능력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확신 아래 어떤 난관에 부딪치더라도 결단력 있게 헤쳐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멘탈의 연금술'을 쓴 보도 섀퍼도 똑같이 속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한계를 넘어 담대한 목표를 이루는 방법을 설명하면서다. 포기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방법들 중 하나가 '추진력'이라고 한다. 기관차가 멈춰있을 때는 아주 작은 저항에도 출발할 수 없지만, 시속 200킬로미터로 달리기 시작하면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다며 이렇게 말한다.

늘 움직이고 있는 중이며, 움직이는 힘을 지니고 있으며, 이미 속도를 내기 시작한 상태가 아니면, 다시 말해 추진력이 없으면 아주 사소한 장애물 하나가 인생 전체를 무너뜨릴 수도 있다. 반면 추진력이 작동 중이면 어떤 방해물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거침없이 뚫고 전진할 수 있다.


이 충만한 삶의 한편에 여유가 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참된 자유를 만끽하며 사는 것이다. 다른 누구나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고 자기중심을 지키며 조화롭게 사는 것이다. 바쁜 직장인, 도시인에게 어쩌면 슬로 라이프란 마음 한켠의 로망 같은 것이다. 한평생 알 수 없는 무언가에 쫓기다가 돌아온 고향집 같다. 은퇴 후 인생 2막에 누리고 싶은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슬로 시티' 같은 도시 인증도 있을까. '슬로 푸드', '슬로 투어' 같은 슬로건도 주위에서 적잖게 볼 수 있다. 많은 현대인들이 농촌, 어촌으로 귀향해 텃밭을 가꾸거나 소일하며 여유롭게 보내는 일상을 꿈꾼다. 한편 참 쉽지 않은 게 느리게 지내는 습관이기도 하다. 늘 경쟁과 빠른 시대 변화 속에서 생존을 위해 허덕이면서 산 결과다. 퇴직 후 시작한 걷기운동 때도 가끔 이런 씁쓸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놀라곤 한다. 2-3시간 느긋하게 걷다가도 앞질러 가는 사람이 생기면 갑자기 돌변한다. 엉덩이에 힘이 팍 들어간다. 경보가 시작되는 것. 급추진한 총총걸음은 거의 뜀박질이 되다시피 한다. 앞서가던 사람도 민망했던지 슬그머니 반대편 산책로로 자리를 옮긴다. "이게 뭐하는 짓이지." 스스로 기가 찬다. 어른이 같이 참 유치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왠지 누군가 자신을 추월하는 게 싫다. 다른 사람 뒷 꽁무니 보면서 원하는 속도도 낼 수 없고 내내 신경 쓰며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슬로 라이프와 전속력으로 목표를 추구하며 속도 내는 삶이 공존하는 풍경. 퇴직 3년 차가 되어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다. 그것도 어렴풋이. 새벽에 자유롭게 깨어서 글을 쓰고, 밤 12시를 넘어 늦게까지 온라인 통역을 돕기도 한다. 운영하는 가게에 손님이 있으면 주말도, 밤낮도 없이 일한다. 투자처 관리를 위해 200여 km 되는 거리를 한 달에 몇번씩 왕복한다. 그러다 일이 또 감쪽같이 사라지면 도서관으로, 산책로로, 길 위의 사무실을 튼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아이디어들을 정리한다. 늦은 아침 은퇴하신 노부모님과 식사와 담소를 나누며 느긋이 TV를 본다. 자연인, 세끼 먹방, 여행, 건장 정보에 귀 기울이며 방구석 슬로 라이프를 즐긴다. 보통은 점심까지 꼬박 챙겨 먹고 집을 나설 때가 많다. 출퇴근 혼잡 시간을 피하는 게 퇴직자의 뉴노멀, 국룰이다. 행여 떠올리기 싫은 직장인의 습성을 벗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면 어떤 때는 일하는 시간이 2-3시간이 채 안 될 때도 있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스스로 다그치지 않는다. 대신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가슴 뛸 때 달리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다. 이게 바로 자기만의 시간, 최대 속도다. 여기서 말하는 전속력이란 물리적인 시간 대비 속도가 아니다. 전심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다. 참된 만족을 위해 다른 허탄한 것에 더 이상 마음을 뺏기지 않는 충만한 상태다. 의무나 형식이 아니라, 시간의 경계 없이 몰입하며 누리는 진심의 시간이다. 강박을 벗고 일과 삶이 하나 되는 자유로움, 새로운 세계다. 인생 1막의 습관과 2막의 희망이 교차하는 반퇴 여정. 슬로 라이프와 전속력 목표 추구가 만날 때,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찾고 즐기는 자기만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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