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협상가'이다. 협상 테이블에 앉는 순간 그 사람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원하는 모든 것을 손대지 않고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협상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누가 얻으면 한 사람은 잃거나,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치킨 게임이 되기도 한다. 때론 정말 서로가 원하는 것을 찾고 사이좋게 나눠가질 수도 있다. 각자 원하는 것이 다르고, 서로에게 없는 새로운 대안을 협상장에서 찾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윈-윈, 상생의 협상 전략을 만들 수 있을까.
부동산 경매는 생존을 걸고 벌이는 치열한 협상 현장이다. 잘 못 된 계약이나 투자로 일순간 전 재산을 잃고 길거리에 나앉기도 하고, 단 몇 줄의 입찰서나 협상 문건으로 작은 집 한 채 값이나 한달치 생활비를 벌기도 한다. 그중 명도는 가장 치명적인 협상 능력을 필요로 한다. 명도 자체가 협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매로 낙찰받은 집은 전 소유자나 세입자 등 점유자와 협상을 통해 인도(명도) 받아야 비로소 자기 집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는 모든 경매 비용을 지불하고도 자신이 산 집의 재산권 행사는 물론 들어가지도 못하는 난감한 경우가 생긴다. 보통은 이사비 등을 합의해 주고 점유자를 원만하게 내보내는 것이 명도의 관례고 미덕이다. 그래서 명도는 경매의 꽃으로 불리기도 한다. 실제적으로 법정 경매 절차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관문이자, 수익률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상황과 성향의 점유자를 상대해야하는 복잡한 다차 협상 방정식이기도 하다. 이런 명도의 어려움과 점유자의 딱한 사정을 고려해 경매가 꺼려지기도 한다. 아예 명도만 수수료를 받고 대행해주는 전문 컨설팅 업체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막상 해보면 아무것도 아니다. 경매는 어쩔 수 없는 법적 절차일 뿐이며, 명도 과정도 일상에서 겪을 수 있는 다른 협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 말은 명도 문제 걱정 없이 누구나 경매에 도전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절박함이 있다면 어떤 삶의 현장에서도 협상의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퇴사 후 3년 동안 경매 초보로 시작해 7채를 낙찰받았다. 덕분에 명도 과정에서 다양한 협상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보통 몇 개월은 걸린다는 명도를 잔금 납부 후 바로 성사시킨 건도 절반이 훌쩍 넘는다. 집 인수 기간이 낙찰 후 한 달이 채 안 걸린 경우도 있었다. 명도 협상 성과는 단순히 집을 인도받는데 그치지 않았다. 비운 집을 단박에 인수받고도 권리자한테 감사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경매 전 살던 임차인과의 재계약 종료 후 그 동생까지 집을 물려받아 사는 경우도 있었다. 어떤 이전 소유자는 부동산 경매 관련 영업 비밀(?)을 전수해 줬고, 누구는 부서진 문고리를 수리해 인계해 주기도 했다. 이사 편의를 봐줬더니 집 나가서도 전기요금, 관리비 등 구두 합의내용을 착실히 정산해준 세입자도 있었다. 압권은 2천만원 안 되는 집을 낙찰받고, 바로 살고 있던 소유자와 재계약을 맺어 매매 차익 1천만원을 남긴 것이다. 협상 중간에 우여곡절을 겪은 곳도 있지만 대개는 원만한 합의를 넘어 이렇게 서로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경매 물건을 목표로 삼은 덕분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떻게 경매 초보가 이런 협상 결실을 거둘 수 있었을까. 정리해보니 그 비결은 4가지 정도였다.
1. 자신감 가지고 밀어붙이되, 때론 져주는 것이 이길 때도 있다.
2. 객관적 기준에 천착하되, 최대한 작게 시작하고 잘게 쪼개 협상 타개를 시도하라.
3. 마지노선을 정하되, 협상의 궁극적인 목적을 잊지 말자.
4. 풍부한 옵션과 상상력으로 무장하라.
1. 자신감 가지고 밀어붙이되, 때론 져주는 것이 이길 때도 있다.
협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다른 것도 마찬가지겠지만, 무엇보다 자신감이 필요하다. 자기 확신을 가지고, 초기 설정한 협상 목표를 우직하게 밀고 나가기 위해서다. 퇴사 후 수차례 경매 입찰을 시도하다가, 처음으로 집 인근 지역의 오피스텔과 빌라 2채를 연달아 낙찰받았다. 오피스텔은 전 소유자가 사망하면서 파산 선고된 재산으로 자녀들에게 상속된 상태였다. 어쩌면 명도 대상자도 분명하지 않은 빈집이었는데, 겁 없이 덜컥 낙찰받았다. 공실이라 문을 따고 들어갈까 법원에 신청해 인도 절차를 밟을까도 수차례 고민했지만 우선 권리자에게 연락해보기로 했다. 법률 대리인 측을 통해 알아낸 미성년 자녀의 후견인 부모한테 전화했다. "00건 낙찰자로 집을 인계받기 위해 연락했습니다."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그럼 비밀번호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 짐을 처리해야 되어서 좀......" 뭔가 주저하는 게 느껴지길래 대뜸 제안했다. "혹시 괜찮으시면 짐은 제가 처리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네, 그럼 그렇게 해주시면 좋겠네요." 이게 웬일인가! 첫 명도 협상은 이렇게 아무런 실랑이도 하지 않고 그저 먹다시피 바로 끝났다. 물론 그냥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집 안에 있던 전자제품과 가구 등 각종 집기류는 넉넉하게 중고 물품 가격을 쳐주고 인수했다. 덕분에 이 전 소유자 가족에게도 생각치 못한 보너스가 생긴 셈이었다. 빌라는 보증금 3천만 원 중 2천만원을 배당받는 소액 임차인이 있었다. 동시에 진행된 다른 5-6건의 유사 물건 중 이 임차인이 가장 피해가 적었지만 여전히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다. 일부 돈을 떼였고, 근 1년 동안 경매 절차로 마음 고생을 했기 때문이다. 명도 협상을 위해 통화하니 아니나 다를까 처음부터 세게 나왔다. "그런 비싼 가격에 왜 낙찰받았냐. 집에 문제가 많다. 자신은 회사를 그만두고 시험준비 중이라 돈이 없다." 등등.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가능하다면 1년 정도는 지금 집에 더 살고 싶다고 했다. 단, 조건이 보증금을 3천에서 2천만원으로 깎아주고, 월세도 줄어든 관리비 혜택만큼 약간 빼 달라고 했다. 워낙 기세가 등등해 아주 젊은 아가씨였음에도 설득을 당해 버렸다. 여러 차례 조건을 협상했지만, 워낙 기준이 확고해 그 조건 대부분을 수용하고 기존 임차인과 재계약하기로 했다. 대신 얻은 것은 비용이나 집수리, 다음 세입자를 구할 동안 공실 문제 등을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었었다는 것이다. 보증금은 바로 회수했고, 대출을 낸 덕분에 자기 돈 하나 들이지 않고 집 한 채를 장만했다. 월세도 원리금을 다 제하고도 남았다. 때론 져주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직접 두드리고 부딪히면 열린다. 협장 테이블에 앉기를 주저 말라. 쫄릴 때 생각하자, 상대도 역시 쫄리긴 마찬가지다.
2. 객관적 기준에 천착하되, 최대한 작게 시작하고 잘게 쪼개 협상 타개를 시도하라.
경매 협상을 할수록 느끼는 건 상대가 괴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 자신과 같은 평범한 소시민인 경우가 많다. 단지 사연이 조금 더 있을 뿐이다. 그러다 한번은 좀 센 상대를 만났다. 낙찰받은 거제도 소형 아파트 소유자 겸 임대인이 전문 부동산 업자였던 것이다. 나중에 들어보니, 이 업자는 해당 아파트 상가 부동산에서만 5년 정도 중개사로 일하며 17채 정도를 사들여 임대 사업을 했다. 한때 부동산 임대 수입만 월 1천만 원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다 지역 경기 악화와 부동산 규제로 부도를 맞은 것이다. 이 경매 물건 중 1채를 낙찰받았다. 여기도 5백만원을 전액 배당받는 월세 세입자가 있었다. 문제는 이 세입자가 배당 신청을 안 해서 법원 기록에 연락처가 없었다. 또 이미 이사 나간 임차권자라 집은 공실 상태였다. 결국 피하고 싶었지만 명도를 위해 직접 임대인이었던 부동산 업자와 연락해 협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업자는 처음에 전화하니 당연히 집을 인도해 줄 것처럼 호의를 보였다. 그러나 나중에 법원 집행 비용의 절반인 100만원 정도만 이사 비용으로 달라고 했다. 집행 비용이란 경매로 낙찰받은 집을 인도받기 위해 법원에 강제 집행을 신청할 경우 드는 비용이다. 각종 행정 비용 및 이사에 드는 인건비와 장비 사용료, 보관료 등을 고려해 산정된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1평에 보통 10~12만원 정도, 사람에 따라서는 이 비용의 절반이나 조금 더 웃돈을 주더라도 원만하게 합의해 빨리 이사 보내는 것이 좋다고 조언하기도 한다. 이것이 경매 명도에 있어서는 협상의 객관적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거제도 아파트는 소형인데다가 공실이고, 관리비까지 100여만원이 밀려있었다. 그런 이유로 더 적은 이사비를 제안했지만, 막무가내였다. 게다가 강제 집행 시 짐 많고 적은 여부를 법원에서 어떻게 아냐며 공실인 건 상관이 없다고 우겼다. 결국 책에서 본 경매 절차를 떠올리고, 실제 법원에 문의한 결과를 차근히 설명해줬다. 그리고 비로소 요구한 비용의 절반인 50만원으로 임대 업자와 합의를 볼 수 있었다. 강제 집행 시 법원 집행관이 집에 들어가 계고장을 붙이고, 이때 짐과 상황 등을 고려해 이사 비용을 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명확한 기준을 들이대니 아무리 경험 많은 업자라 해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자신이 잘 못 알고 있는 것도 있었다. (이후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