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포로 여행 사진에세이
허리까지 빠질 만큼 눈이 쌓인 도시에 대한 오래된 로망이 있었다.
그 로망은 늘 막연했고, 구체적인 계획으로 옮겨진 적은 없었다.
다만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 언젠가는 꼭 한 번 살아보고 싶은 풍경으로 남아 있었을 뿐이다.
나는 늘 눈이 많이 오는 도시를 경험해보고 싶었다.
그것은 여행이라기보다, 하나의 계절을 통째로 건너보는 일에 가까웠다.
러시아처럼 극단적인 추위의 이미지가 아니라,
조금은 인간의 생활과 맞닿아 있는 눈의 도시.
포지션의 뮤비 속 캐나다, 그리고 오래전 조성모의 뮤직비디오 속 설경처럼—
삿포로는 언제나 나에게 신비에 가까운 이름이었다.
그 신비는 설명되지 않아 더 오래 남았다.
술자리에서 여행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사람들은 종종 자신도 모르게 이런저런 마음을 흘려보낸다.
그날도 그랬다.
누군가가 “겨울엔 역시 삿포로지”라고 말했고,
그 말은 이상하리만치 자연스럽게 내 안에 잠들어 있던 역마살을 두드렸다.
그리고 우연처럼,
일행 중 한 명이 매년 삿포로에 한 달씩 머물다 오는 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순간, 이 여행은 이미 절반쯤 결정되어 있었다.
나는 원래 충동적인 선택을 경계하는 편이지만,
이상하게도 이번만큼은 망설임이 없었다.
‘지인이 있다’는 사실은 핑계였고,
사실은 이미 마음이 먼저 그곳에 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나의 삿포로행은,
조용히 그러나 한밤중에 몰래 내리는 눈처럼 시작되어 버렸다.
인천공항으로 향하던 날,
마치 예견처럼 가벼운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안동의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그 차가움은 곧 삿포로의 공기로 이어질 예정이었다.
안동에서 시작된 여정은 생각보다 길었다.
새벽에서 시작된 여정은 밤 9시가 되어서야 치토세 공항에 도착하는 일정이었지만,
설렘 덕분인지 시간은 무겁지 않았다.
공항에서 철도로 갈아타고,
어두운 창밖을 바라보며 삿포로 시내로 들어갔다.
도시는 이미 밤에 잠겨 있었고, 언뜻언뜻 보이는 도시의 풍경 속 그 어둠 위로 눈이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
삿포로의 첫인상은 단순했다.
세상 전체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지인의 말로는 며칠째 맑았고 눈도 거의 오지 않았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가 도착한 날의 삿포로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모든 것을 하얗게 집어삼킨 상태였다.
소리는 흡수되어 먹먹하게 들리고,
빛은 눈 위에서 한없이 반사되어 도시의 풍경을 부드럽게 바꾸어 주었다.
도시는 살아 있었지만, 동시에 잠들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 정적이 좋았다. 마치 꿈결 속을 거니는 느낌이었다.
이 도시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기보다,
그저 가만히 곁에 있어주는 방식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택시에 몸을 싣고 숙소로 향했다.
두껍게 얼어붙은 도로 위를 달리는 택시는
믿기지 않을 만큼 안정적이었다.
한국이었다면 분명 거북이처럼 움직였을 도로.
그러나 삿포로의 택시는 마치 이니셜 D 속 장면처럼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속도를 유지했다.
나는 괜히 창밖을 더 오래 바라봤다.
이 도시에서는 위험마저도 일상이 되어버린 듯했다.
눈 위에서조차 생활이 유지되는 곳.
그 사실이 삿포로를 더 신뢰하게 만들었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숙소에 도착했을 때,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멀리 보이는 '로손'편의점의 간판이 드디어 삿포로에 도착했구나 실감 나게 해 주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우리는 잠들기엔 너무 깨어 있었다.
지인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번화가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눈은 실시간으로 도시를 덮고 있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번 삿포로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눈은 배경이 아니었다. 삿포로의 캐릭터를 명확하게 해주는 주인공이었다.
빛을 키우고, 사람을 더 선명하게 만들었다.
도시는 차갑기보다, 오히려 활기가 넘쳤다.
함박눈이 춤추는 밤, 삿포로의 심장박동
늦은 시각이었지만, 야행성 여행자들의 밤은 이제 시작이었다.
지인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번화가는 고요했던 주택가와는 딴판으로 사람들로 와글거렸다.
따뜻한 사케 한 잔을 기울이며 바라본 창밖에는 실시간으로 엄청난 양의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펑펑 쏟아지는 눈송이들은 도시의 네온사인을 받아 몽환적인 색으로 빛났다.
그 압도적인 풍경을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실감이 났다. "아, 내가 정말 꿈꾸던 눈의 도시에 왔구나."
이튿날, 느지막이 일어나 해장을 위해 나선 거리는 밤과는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시는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눈축제(유키마츠리) 준비로 분주했다.
거리 곳곳에는 조각되기를 기다리는 거대한 각얼음들이 투명한 보석처럼 쌓여 있었고,
축제를 앞둔 들뜬 공기가 차가운 바람 사이로 흐르고 있었다.
사람 키보다 높게 쌓인 눈 벽 사이로, 캐리어를 끌고 삼삼오오 이동하는 관광객들의 모습은
마치 눈밭을 뒤뚱거리는 펭귄 무리처럼 귀여웠다.
발을 디딜 때마다 '뽀득뽀득' 들려오는 눈 밟는 소리가 낯선 여행의 배경음이 되어주었다.
안도 타다오가 빚어낸 경외, 눈 속에 잠긴 '두대불'
수많은 관광지 중 내 영혼을 가장 강렬하게 사로잡은 곳은
단연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이 있는 '부처의 언덕(두대불)'이었다.
지방 소멸의 위기 속에서 공원묘지의 조경을 위해 세계적인 거장에게 의뢰했다는 이곳.
초입에서 마주한 모아이 석상과 중앙에 위치한 스톤헨지는 다소 엉뚱한 혼란을 주었지만,
그것은 클라이맥스를 위한 복선에 불과했다.
새하얀 설원 한가운데, 노출 콘크리트의 차가운 질감과 눈의 부드러움이 만나는 그 지점에
거대한 불상이 있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빛과 눈, 그리고 압도적인 고요.
그 거대한 불상을 마주한 순간, 종교를 떠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깊은 경외심이 밀려왔다.
사람들이 입을 모아 칭송하던 오타루 운하의 아기자기함보다,
나는 이 광활한 설원 속 불상 앞에서 더 큰 전율과 감동을 느꼈다.
뚜렷한 목적과 명확한 메시지를 가진 공간이 주는 힘은,
그곳에 닿기까지의 거리나 시간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게 만들었다.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눈과 도시가 이토록 잘 어울리는 곳은 처음이었다.
눈발로 인해 모든 불빛은 더 반짝였고,
사람들은 그 속에서 더 활기찼다.
눈 덕분에 도시는 늘 깨끗했고,
어디로 넘어져도 푹신할 것 같은 풍경은
묘하게 마음까지 포근하게 만들었다.
삿포로는 차갑지 않았다.
눈이 많다는 사실이,
이 도시를 더 따뜻하게 만들고 있었다.
이 여행을 돌아보면 어디를 갔는지보다
어떤 감정으로 걸었는지가 더 선명하다.
삿포로는‘다녀왔다’기보다‘ 한 계절을 잠시 살다 온 곳’처럼 기억되었다.
눈 속에서 나는 조금 더 느려졌고,
조금 더 조용해졌으며, 조금 더 나 자신에게 가까워졌다.
아마 그래서일 것이다.
삿포로를 떠올리면 어떤 장소보다도 먼저,
그날의 공기와 침묵이 함께 떠오른다.
눈은 언제가 녹아 있겠지만, 삿포로에서 보낸 시간은 이상하리만치 오래 기억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