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일상으로의 초대
1. 겨울에 더 멀어지는 것들
본래 여행을 안 좋아한다.
겨울 아침처럼 말갛고 차가운 공기 속, 낯선 곳은 언제나 더 멀게 느껴진다.
이 계절의 적막함은 여행에 대한 내 감상과 닮은 부분이 있다.
나는 친숙한 곳을 벗어난다는 생각만으로, 집을 억지로 빼앗긴 달팽이가 되는 듯하다.
일상을 벗어난 여행이 주는 기쁨이 있을 것이다.
새로운 먹거리, 특색 있는 숙소나 기념품.
혹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낯선 풍경이 선사하는 신선함.
그러나 달팽이를 설득해 호화 크루즈를 태워준다 한들, 여행이 끝난 뒤 달팽이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대단히 감사합니다만, 제 집은 어디 있죠?"
2. 서커스단 입단의 추억
어린 시절, 미취학 아동이었을 때부터 나는 이런 상태였다.
어느 날이었던가, 엄마 없이 아빠와 오빠, 나 이렇게 셋이 좀 멀리 간 적이 있었다.
주변의 낯선 풍광에 덜컥 겁이 났다.
우리는 길을 잃을 것이고, 영영 집에 못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서커스단에 들어가야겠지? (전날 티브이에서 서커스쇼를 봤다.)
나는 엉엉 울며, 밥은 먹고 살아야겠기에 서커스단에서 내가 부릴 수 있는 잔재주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여행은 내게 그런 대상이다. 낯설고, 무서운 곳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일.
3. 조식뷔페라는 마법
이런 감상이 조금 바뀐 것은 결혼하고 나서다.
폐쇄적인 J형 성향인 나와 달리 남편은 실행력과 계획성, 거기에 강력한 역마살까지 갖추고 있었다.
연애 시절, 국책 연구원이었던 그는 엑셀 파일로 데이트 일정을 짜와 내 혼을 빼놓았다.
첫째가 태어나고 셋이서 여행을 참 많이도 다녔다.
움직이기 싫어하는 내게 남편은 마법과 같은 말을 했다.
"조식 뷔페 먹으러 갈래?" 아휴, 내가 힘이 있나. 얼른 짐을 싸야지.
쌍둥이가 생긴 뒤에는 다섯이서도 다녔다.
아이가 셋이면 짐은 세 배가 아니라, 계절이 겨울일 때는 거의 소규모 이사에 가깝다.
그나마 이유식과 기저귀를 떼고 나서야, 캐리어 하나를 줄이며 숨을 고를 수 있었다.
아직도 나는 여행을 잘 즐기는 사람은 아니다.
집을 두고 나온 연약한 달팽이처럼, 이런저런 걱정들이 길게 꼬리를 끌고 따라온다.
4. 미술관이 찍어준 스탬프
그럼에도 막상 여행을 가면 물색없이 설렌다.
원래도 부족한 금전 감각이 더 둔해져서 맛있는 음식을 이것저것 사 먹고,
밤늦게까지 아이들이 놀아도 모르는 척, 남편과 술 마시는 것도 재밌다.
여행지에 미술관이나 전시회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다.
작년 여름, 강원도 오0밸리의 미술관은 그 자체로 압도적인 경험이었다.
일상에서 보기 힘든 드넓은 공간. 그곳에 전시된 대형 조형물들은 현실 감각마저 살짝 흐리게 만들었다.
이 겨울에도 그날의 풍경은, 다시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 거대한 조형물 앞으로 데려간다.
여행은 이렇게, 시간을 건너뛰는 문을 하나 남긴다.
이런 경험은 마치 여행지의 스탬프처럼 기억에 새겨진다.
"좋은데 데려가봐야 소용이 없다..." 남편이 한탄할 만큼 나는 기억력이 영 별로다.
하지만 이 잉크는 꽤 강력해서 아마도 오래도록 여행 지도에 남아있을 것 같다.
5. 사연을 내려놓는 공간의 힘
이런 강렬한 추억 외에 집순이마저도 꼽을 수 있는 여행의 즐거움을 나는 책에서 발견했다.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에는 수많은 아름다운 여행의 쓸모가 나온다.
그중, '상처를 몽땅 흡수한 물건들로부터 달아나기' 장이 오래 마음에 머물렀다.
새 거처 속 공간은 일상에서 우리가 자잘하게 사용하며 쌓아온 사연으로부터 완전히 배제된 곳이다.
새 숙소는 늘 정갈하고, 새것이 구비된다. 나 역시 그런 점에서 여행이 좋다.
호텔 방에서 나는 물컵을 어디에 두었는지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
누가 쓴 흔적인지 따지지 않아도 되는 공간.
그 자유 속에서, 나는 잠시 아무 사연 없는 사람이 된다.
6. 달팽이 걸음, 시작
나이가 들어서 가는 여행은 어떨지 궁금하다.
둘이서 가는 여행은 어떨지, 혼자 훌쩍(가기에는 겁이 많아 온갖 계획을 세운 뒤) 떠나는 것은 또 어떨지.
언젠가 좀 더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는 날.
그때는 '이래서 나는 여행이 좋노라', 집순이로서 한껏 으스대며 글을 써볼 생각이다.
나는 걸음이 느리므로 달팽이처럼 조금씩 일상을 떠날 마음을 먹어본다.
요즘은 예쁜 캐리어 구경을 하고 있다.
천리길도 캐리어 쇼핑부터 시작이니까!
집을 등에 이고도 떠날 수 있다는 걸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겨울의 끝에서 봄을 예감하는 순간처럼,
언젠가 올 그 여행의 순간을 조용히 품어둔다.
그리고 이상하다.
생각만 해도, 벌써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