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식 시대의 문턱에서 만난 이름

나오카 3rd - Nikon F-501

by hongrang

경계 위에 선 카메라


역사에는 늘 문턱이 있다.

문을 완전히 나서지도, 그렇다고 방 안에 머물지도 못하는 애매한 자리.


F-501은 그런 자리에 서 있던 카메라였다.

수동의 시대를 지나 자동의 시대로 넘어가던 숨 고르기.

기계의 고집과 전자의 야심이 한 몸에 얹히던 순간.


겉모습은 여전히 각이 살아 있다.

어깨는 단단하고, 선은 직선적이다.

그러나 셔터를 누르면 그 안에서 작은 모터가 숨을 쉰다.

과거와 미래가 한 몸 안에서 어색하게 공존한다.


나는 오랫동안 이 바디를 ‘정보’로만 알고 있었다.

니콘이 자동초점 시대로 건너가며 남긴 흔적.

그 문장은 건조했지만, 손에 쥐었을 때의 온도는 전혀 달랐다.


상자 속에서 건져 올린 시간


일본 옥션의 묻따박스.

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운명.


상자를 여는 순간, 먼지 냄새와 오래된 기계유의 향이 섞여 올라왔다.

그 안에서 F-501을 꺼내 들었다.

플라스틱 외장, 군데군데 남은 생활의 흔적.


그런데 손에 쥐자 묘한 밀도가 느껴졌다.

가벼운 재질과는 다른, 단단히 응축된 시간의 무게.


“남자는 니콘.”

어디선가 들려오는 농담 같은 말.

새를 찍기 위해 숲으로 들어간다는 유저들,

망치 대신 FM2로 못을 박았다는 과장된 이야기.


F-501은 그 전설의 계보에 서 있는 과도기의 자식이었지만,

손 안에서 느껴지는 기세만큼은 분명 ‘도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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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효하는 셔터


배터리실을 닦고 AA 건전지를 밀어 넣었다.

필름을 장전하고, 셔터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찰칵—이 아니라,


철컥.


그리고 이어지는 모터의 숨.


그 소리는 골목을 울릴 만큼 당당했다.

조용히 훔쳐 찍는 태도가 아니라,

장면 앞에 서서 기록을 선언하는 목소리.


요즘의 전자식 셔터가 스피커를 통해 흉내 내는 소리와는 다르다.

이건 실제로 무언가가 움직이며 남기는 울림이다.

빛을 가르고, 필름을 당기고, 기계가 몸을 흔드는 진동.


나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카메라를 쥐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시간을 붙들고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느린 초점, 신세동의 골목


이 느리고 시끄러운 친구와 함께 향한 곳은

안동 신세동의 높은 동네였다.


골목은 비좁고, 계단은 가파르다.

벽화가 덧입혀졌지만 그 아래에는 여전히 오래된 숨결이 남아 있다.


F-501의 자동초점은 지금 기준으로 느리다.

뷰파인더 중앙의 작은 영역이 피사체를 더듬는다.

렌즈가 ‘지잉’ 하고 움직이며 잠시 망설인다.


그 망설임이 좋았다.


골목도 그렇게 움직인다.

서두르지 않고, 숨을 고르며, 한 걸음씩.


초점이 맞춰지는 동안

나는 장면을 한 번 더 바라보게 된다.

담벼락 위에서 볕을 쬐는 고양이,

빨랫줄에 걸린 셔츠의 미세한 흔들림,

갈라진 시멘트 틈에서 자라난 풀.


카메라의 느림이

내 시선을 조금 더 오래 머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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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와 골목의 닮은 결


신세동은 매끄럽지 않다.

벽은 고르지 않고, 계단은 삐뚤다.

시간이 덧칠된 자국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F-501도 그렇다.

완벽하지 않은 AF,

손끝에 남는 미세한 셔터 쇼크,

묘하게 거친 호흡.


둘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너무 깨끗한 최신 장비로 담았다면

이 골목은 어쩌면 낯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과도기의 바디는

풍경의 균열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불완전함이 서로를 이해하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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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덕 위에서


가장 높은 지점에 올라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골목은 좁게 오르지만, 시야는 넉넉하다.

겹겹이 이어진 지붕과, 낮게 깔린 빛.


셔터를 눌렀다.


철컥.


그 소리가 언덕 위 공기를 한 번 가르고 지나갔다.


나는 생각했다.

이 카메라는 단지 자동초점의 시작이 아니다.

니콘이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며 내쉰 한 번의 깊은숨이다.


그리고 오늘,

그 숨은 나의 호흡과 섞여

신세동 골목 어딘가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시간을 알렸지만

나는 한동안 카메라를 내려놓지 못했다.


아직 손바닥에

그 거친 진동의 여운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