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오카 3rd- EOS KISS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시간이었다. 친구의 출판기념회를 위해 서울로 향하는 첫차에 몸을 실었다. 10년 만에 세 번째 책을 세상에 내놓는 친구를 생각하면, 그 자리에 함께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여정이었다.
창밖으로 스치는 겨울 끝자락의 공기는 여전히 매서웠다. 이른 아침의 플랫폼에는 첫차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의 발걸음이 분주했다. 차가운 공기 사이로 햇빛이 번져 나오자 사람들은 그 찬란한 빛 속을 가로질러 각자의 하루로 빠르게 흩어졌다.
저녁에 시작되는 행사였지만, 이 기회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다.
가방 속에는 오늘의 산책을 위한 필름 두 롤이 들어 있었다. 하나는 Kodak ColorPlus 200, 또 하나는 도시의 밤빛을 담기 위해 챙긴 Kodak Vision3 500T였다.
그리고 오늘의 카메라.
손에 들려 있던 것은 Canon EOS Kiss였다.
사진가들에게 이 카메라는 조금 애매한 위치에 있다. 클래식한 금속 바디의 필름 카메라처럼 낭만을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현대적이고, 그렇다고 완전히 디지털 시대의 기계도 아니다. 겉모습만 보면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카메라로 착각할 정도로 현대적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사실 그 인상은 틀리지 않다.
훗날 등장한 Canon EOS 300D가 바로 이 EOS Kiss 계열의 디자인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필름의 시대가 끝나갈 무렵, 캐논은 카메라를 조금 더 대중적인 기계로 만들고 있었다. EOS Kiss는 그 흐름 속에서 탄생한 모델이었다. 사진가의 손에 들어오기보다는, 여행자의 가방 속으로 들어가기를 바랐던 카메라였다.
오늘 서울의 하루에는 그런 가벼움이 어울렸다.
오늘 함께한 렌즈는 Canon EF 40mm f/2.8 STM였다.
디지털 시대에 등장한 렌즈지만, EF 마운트를 공유하는 EOS Kiss에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이 렌즈의 가장 큰 매력은 단순하다. 작고, 가볍다.
펜케이크라는 이름처럼 렌즈는 바디에 거의 붙어 있는 듯한 얇은 형태를 가지고 있다. 카메라를 목에 걸고 걷다 보면 어느 순간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된다.
40mm라는 화각도 재미있다.
35mm보다 조금 좁고, 50mm보다는 조금 넓다. 그래서 거리의 풍경을 담기에도, 사람의 모습을 담기에도 어색함이 없다. 그야말로 산책 카메라에 어울리는 화각이다.
조리개 f/2.8.
빛이 충분한 낮에는 거리의 풍경을 또렷하게 담아내고, 저녁이 가까워지면 실내에서도 충분히 버텨준다. 가볍게 한 손으로 파지하고 흔들림만 조심하면 대부분의 상황에서 무리 없이 촬영할 수 있다.
무겁고 느린 카메라가 사진을 깊게 만든다고 믿는 사람도 있지만, 때로는 이렇게 가벼운 장비가 오히려 더 많은 장면을 만나게 해주기도 한다.
오늘의 서울은 그런 날이었다.
오랜만의 공식적인 자리였다.
출판기념회에 가기 전에 홍대의 단골 미용실에 들르기로 했다.
예전에는 자주 오던 동네였지만, 한동안 발걸음이 뜸했던 곳이었다.
지하철에서 올라와 거리를 걷자 낯선 감각이 먼저 다가왔다.
홍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는 밤이 되면 술에 취한 청춘들이 거리를 채웠고, 음악과 웃음소리가 뒤섞여 늘 소란스러운 분위기였다. 길모퉁이에는 공연이 있었고, 골목에는 작은 술집들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홍대는 조금 더 정돈된 모습이었다.
깨끗하고 조용했다.
전날 밤을 보낸 청춘들의 흔적도, 골목을 점령하던 비둘기들도 눈에 띄지 않았다. 어쩌면 시간이 흐르면서 도시도 조금씩 성숙해지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는 여전히 청춘의 빛이 남아 있었다.
햇빛 속을 걷는 젊은 얼굴들.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촬영하는 사람들.
어딘가로 서둘러 가는 발걸음들.
그 모든 장면들이 서울이라는 도시가 가진 특유의 에너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필름 속에 그 풍경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활기찬 거리를 걷다 보니 어느새 해가 기울기 시작했다.
겨울의 해는 늘 빠르게 넘어간다.
행사가 열리는 인사동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친구의 세 번째 책 출간을 축하하기 위해 찾아온 사람들이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친구였다.
그래서인지 그 주변에는 늘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사람들은 웃고 이야기하며 책을 축하했고, 오랜만에 만난 얼굴들이 반가운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도 몇 장의 사진을 조용히 남겼다.
카메라는 늘 그런 순간에 유용하다.
말을 대신해 장면을 기억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행사가 끝난 뒤에도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카메라를 들고 정처 없이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맑은 향이 흘러왔다.
향의 방향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조계사 앞에 도착해 있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 가까워서인지 경내는 연등으로 가득했다.
수많은 등이 바람에 살짝 흔들리며 부드러운 빛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늦은 시간에도 몇몇 사람들은 조용히 기도를 하고 있었다.
나도 잠시 합장을 했다.
오늘 만난 사람들의 앞날을 위해.
그리고 나의 작은 소원들을 위해.
향내가 천천히 공기 속에 퍼졌다.
그 향은 마음을 조금씩 차분하게 만들었다.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치 하루 동안의 모든 장면들이 천천히 정리되는 것처럼.
오늘 서울의 풍경들은 아직 필름 속에 잠들어 있다.
현상소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어떤 장면이 남아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다.
친구의 책이 오랜 시간을 지나 세상에 나오듯,
오늘의 서울도 조금 늦게, 필름 속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