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납작한 기억의 틈

나오카 2nd - KOdak_ektralite10.008

by hongrang

찌이익—, 틱.


나는 황학동을 좋아한다.

어릴 적 풍족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원할 때마다 원하는 걸 살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사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갈증이 오히려 오랫동안 나를 이끌어왔다.


카시오 전자시계, 니콘 FM2, 오락기, 라디오…

내가 놓친 시간의 조각들은 대부분 물건의 형태로 남아 있었다.

그런 내게 황학동은 마치 현실의 시간여행기였다.

중고 가판대 위에 놓인 세월의 조각들.

그중 가장 자주, 가장 만만하게 마주치던 존재—

바로 Kodak Ektralite 10이었다.

000018.JPG 바다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갈매기들

아무 설명 없이 다가오는 기계


110mm 필름을 사용하는 카메라,

플라스틱 몸체에 납작한 디자인.

카메라라기보단 마치 장난감처럼 보이는 생김새에

황학동 초보 디거들은 누구나 한 번쯤 손에 넣어봤을 법한 모델이다.


나 역시 그랬다.

지갑이 쉽게 열렸고, 그보다 더 쉽게 잊혔다.

당시엔 작동 여부조차 모른 채

“언젠가는 쓸 날이 오겠지”라는 희망만으로 수집했던 녀석.

필름도, 현상소도 없는 시대엔 그저 전시용 인형처럼 묵혀두는 수밖에 없었다.

IMG_7761.jpeg 함께한 모델은 같이 구매한 컨셉토 대만모델

그러다 세상이 변했다.

레트로의 부활, 필름의 귀환, 그리고 110mm의 회생.

이 작은 카메라의 시간도,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드디어, 그 첫 셔터


오래도록 간직해 온 로모 타이거 110 필름을 장전하며

나는 진심으로 설레었다.

물론, 이 카메라엔 설명서도 없고, 설정도 없다.

초점도 고정, 조리개도 고정.

플래시는 꺼지지 않고 무조건 터진다.

000024.JPG 가이드넘버가 2~4 수준의 플래시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 와인딩과 셔터뿐.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단순함이 주는 ‘해방감’이 있었다.

아무것도 조절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

‘잘’ 찍지 않아도 된다는 용서.


납작하고 가벼운, 휴대성의 끝판왕


바닷가 근처로 작은 여행을 떠났고

이 납작한 기계는 주머니 속에 쏙 들어갔다.

AA 건전지 두 개, 그리고 푸시업 방식의 와인딩 레버.

그걸 밀어 올릴 때마다 찰칵, 찰칵, 찰칵

아이처럼 신나서 셔터를 눌렀다.


110 필름 특유의 작은 면적은

이미 희뿌연 결과물을 예고했지만,

그 안에서 나름의 선명함을 찾아내는 재미가 있다.

상단에 노출되는 컷 수와 인포 라벨,

작고 말랑한 이미지의 경계,

마치 폴라로이드의 반쪽짜리 미니어처처럼

귀엽고 유치하고 정겹다.

000008.JPG 영덕의 바닷가
000009.JPG
000013.JPG
000015.JPG
000016.JPG
000019.JPG 특유의 액자 프레임의 특별함

프레임이 모든 걸 용서한다


사실, 화질로만 따지자면

토이카메라라고 말하는게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액자프레임.

110mm 필름 특유의 비율,

그 안에 담긴 시간의 색감과 텍스처,

그 모든 것이

화질이라는 기준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건 ‘잘 찍는 카메라’가 아니라

**‘재밌게 기억하는 카메라’**다.

그리고 그 기억은, 선명함보다 오래간다.

IMG_7764.jpeg 단출한 파인더

황학동의 자그마한 복수


코닥 엑타라이트 10은

결코 명기(名器)가 아니다.

카메라로써 성능은 평균 이하고,

플래시는 꺼지지 않으며,

렌즈는 시간과 함께 노랗게 바래버린다.


하지만 나는 그걸 보며 문득,

어릴 적 갖지 못했던 수많은 물건들과

그들을 바라보던 나의 눈빛을 떠올린다.

Ektralite 10은 나의 갈증이었던 시간에 대한 작은 복수였고,

그 기억을 다시 찍는 오늘의 유머였다.


찌이익—, 틱..


이 카메라를 쥐고 다시 황학동을 걷는다면

아마 나는 또 같은 카메라를 하나 더 집어 들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물건에게서조차

마음이 가는 순간이 있다는 걸

우리는 결국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셔터를 누르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000011.JPG 여행용 카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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