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망경, 솟아오르다
후지카의 비밀 버튼

나오카 2nd - Fujica 35EE.007

by hongrang

쭈우욱 욱-촬칵

008125170009250818.jpg 조명이 없는 방에서도 F1.9

카메라 더미 속에서 문득 마주친 이름 하나, 후지카 35EE.

내 손바닥에 올려진 순간, 어떤 낯섦이 느껴졌다.

상단이 아닌 하단에 배치된 와인딩 레버.

무언가의 구조가 틀어져 있는 듯한 인상.

그 어색함이 오히려 흥미로웠고, 조심스럽게 렌즈를 마주했다.


전면에는 셀레늄 노출계가 자리 잡고 있었고,

흔히 보던 오돌토돌한 격자무늬 대신

마치 카페 창문 같고, 누군가는 태양광 패널이라 착각할 법한 평면적인 디자인.

정말로 태양으로 작동하는 건 아닐까,

잠시 헛웃음이 났다.

그렇지만 셀레늄이 살아 있다면, 이건 횡재에 가까운 발견이다.

008125170007250818.jpg 독특한 조명환경에서 F1.9

고요한 뷰파인더, 불친절한 설명


파인더를 들여다봤다.

아주 단출했다.

다이아몬드 형태의 이중합치와 프레임 라인.

노출값을 알려주는 바늘이 상단에서 움직이긴 했지만

어떤 숫자도, 색깔도, 안내도 없었다.

오로지 사각 프레임에만 집중할 수 있는 구조.

IMG_9086.jpeg 파인더

그 구조가 이상하리만치 나를 끌어당겼다.

셔터 속도는 카메라 상단의 다이얼로 조정되고,

노출계 바늘의 움직임에 따라

렌즈 앞에서 직접 조리개를 수동 조정해야 한다.

IMG_9087.jpeg 아날로그 노출계와 거리계

아주 오래된 TV모드까지 존재한다는 점에서

후지카는 분명히 그 시대에 앞서가려던 노력이 느껴졌다.

그러나 내가 가진 기기에서는

파인더 내 붉은 인디케이터는 점멸하지 않았고

노출 보정의 시각적 가이드는 끝내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익숙하지 않은 방식 속에서, 오히려 몸이 먼저 기억하는 사진의 감각이 살아났으니까.


정답 없는 테스트, 정서적인 결과


테스트 필름으로는 Kodak 500T 영화 필름을 선택했다.

ASA 100으로 맞춰, 실내와 야외, 낮과 밤

어디든 들고 다니며 셔터를 눌렀다.

아무런 사전 정보도, 사용법도 없었기에

내겐 오히려 모든 상황이 실험이었다.

처음 만나는 기계를 믿지 않고 어떻게 ‘잘’ 찍을 수 있겠나.

나는 그냥, 셔터를 눌렀다.

그저 이 기계가 나에게 어떤 표정을 보여줄지 궁금했을 뿐이다.

008125170029250818.jpg 안동시
008125170031250818.jpg 오래된 노포
008125170032250818.jpg 안동시

렌즈는 45mm f1.9,

야간에도 큰 무리 없이 저속 셔터로 촬영이 가능했고

리프 셔터 특유의 소음과 안정감은

정적인 풍경에 묘한 집중력을 만들어주었다.


렌즈 측면의 플래시 단자에 Pentax AF-16을 연결해 보았는데,

동조 문제없이 발광했고, 광량도 제법 만족스러웠다.

요즘 카메라들에는 없어진 콜드 슈 + 동조 단자 조합.

오히려 그런 방식이 클래식 카메라의 멋을 완성시키는 장치가 아닐까 싶다.

조금 불편하지만,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IMG_9092.jpeg 펜탁스 AF-16

… 그런데, 이 카메라를 만지다 보면

진짜 깜짝 놀랄 장면이 하나 더 있다.


오토 모드를 활성화하는 순간,

조용하던 바디에서

툭— 하고 셔터 버튼이 솟아오른다.


진짜다.

마치 바닷속에서 잠망경이 튀어나오듯,

아무 말 없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툭, 하고 위로 솟구치는 그 움직임은

너무도 엉뚱하고 귀여워서

순간적으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나 여기 있고 너, 거기 있었구나.”


카메라가 갑자기 나를 바라본 것만 같은 기분.

기계가 먼저 말을 건넨 듯한 감각.

기술적 기능보다도,

움직임의 유머감각에 감탄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셔터 버튼이 튀어나오는 그 짧은 찰나가

이 카메라에 정을 붙이게 만든 진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기계가 감정을 가진다면,

아마 이런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을까 싶은…

008125170021250818.jpg AF-16 동조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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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카라는 이름, 정서라는 온도


혹시라도 누군가 ‘후지카’를 듣고

“어, 그거 난로 브랜드 아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하고 싶다.


“맞아요. 근데 카메라도 있어요.

그리고 마음속 불꽃은, 난로나 카메라나 비슷하잖아요.”


글자를 달리 쓰지만,

어쩌면 이 카메라는 나에게 작은 정서적 난로 같았다.

무언가를 정확하게 측정하고 따져가며 쓰는 기계가 아니라,

그저 손에 쥐었을 때 따뜻한 감각을 전해주는 존재.

작은 바늘 하나와 조리개 링,

불편한 스트랩 위치와 친절하지 않은 파인더 속에서도

이 카메라는 고요하게 제 역할을 해냈다.

008125170024250818.jpg

그리고 다시, 쭈우우욱-촬칵


모든 게 완벽할 필요는 없다.

그저 사진을 찍고 싶게 만드는 것.

후지카 35EE

그 낯섦과 어긋남 덕분에 더 깊게 기억되는

내 오래된 카메라 이야기 속의 한 장이다.


햇살 한 줌에도 노출계가 반응하고,

내가 멈춰 선 자리에서

조용히 찰칵 소리를 들려주는 그 순간들.


나는 그 따뜻함을 정서의 온도라고 부르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도, 그 온도에 기대어

또 한 장을 남겨본다.


008125170026250818.jpg 영화필름 특유의 색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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