뚱뚱한 빨간 카메라, 그리고 무심한 듯 정확했던 기록

나오카 2nd - KONICA TOPs. 005

by hongrang

찍, 위이이잉—

작지만 분명한 모터음이 울리고,

붉은 셔터 버튼 아래 붉은 램프가 깜빡인다.

자동카메라의 셔터음은 늘 조용하고 부드럽지만,

코니카 Top’s는 유독 ‘두 배 빠르게’ 반응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런 점에서 이 뚱뚱한 빨간 카메라는

의외로 굉장히 성실한 기계였다.


장난감 같은 빨간 카메라, 경매로 날아들다


이 카메라와의 만남은 계획에 없었다.

솔직히 내가 원하던 건 C35 EF3 레드 컬러 모델이었다.

하지만 오래 장터를 기웃거릴 수 있을 만큼

그 모델에 대한 열정이 오래가지는 않았고,

그 사이 옥션 경매에 슬쩍 올라온 이 붉은색 Konica Top’s가 눈에 들어왔다.


약 10만 원가량의 비교적 저렴한 금액.

입찰은 수월했고, 인기 모델이 아니었기에

크게 경쟁 없이 내 손에 들어왔다.


처음 박스를 열고 마주한 인상은 ‘뚱뚱하다’는 것이었다.

P&S라면 당연히 슬림함을 기대하게 되는데,

이 카메라는 보기 드물게 통통한 외형을 자랑했다.

귀엽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솔직히 처음엔 ‘이쁜데 왜 이렇게 두껍지?’ 하는 의문부터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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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정쩡한 조리개, 그러나 결과물은 탄탄했다


Top’s의 렌즈는 34mm f/4.4.

빅미니 시리즈보다 1mm 넓은 화각이지만,

조리개 수치는 더 어둡다.

스펙상으로 보면 뭔가 애매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진은 잘 나온다.

008120330009250812.jpg 한낮의 뜨거운 햇살과 어울리는 하늘

조리개 수치에 비해 결과물은 어둡지 않고,

오히려 빈티지한 무드를 가득 담은

진득하고 묵직한 느낌을 준다.

빛을 과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약간 눌러주는 톤.

어쩌면 그런 특성이 이 카메라를 ‘보급형 빅미니’라는 이미지 이상으로 기억에 남게 해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별도의 ISO 다이얼도 없다.

DX 코드가 있는 필름을 사용하면 ISO 100/200/400을 자동으로 인식한다.

나는 100 감도의 필름을 넣었고,

노출은 한 번도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다.

008120330006250812.jpg 붉은 바디와 어울리는 붉은 포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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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은 단출하다, 그래서 오히려 좋다


기능이라고 할 만한 건 셀프타이머, 데이터백, 자동 리와인더 정도.

플래시는 조용하게 발광하고,

충전 시간도 짧다.

플래시 발광 준비가 되면 작은 붉은 아이콘이 파인더 옆에 뜬다.

셔터 버튼도 두 단계로 나뉘어 있어,

살짝 누르면 포커스 고정, 더 누르면 촬영이 이뤄진다.

비록 고정 초점이긴 하지만, 핀 나간 사진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안정적이었다.


최소 초점거리는 약 1미터.

팔을 뻗었을 때보다 약간 더 뒤에서 촬영해야 정확하게 맞는다.

하지만 그 정도 거리감은

일상의 스냅에선 크게 불편함이 없다.


빨간 바디와 함께한 바닷가

008120330018250812.jpg 영덕인근의 바닷가 물회집
008120330021250812.jpg 경정해변 가는 길
008120330023250812.jpg 오후에 낮잠
00812033002425081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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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카메라는 나와 함께 당일치기 바닷가 여행을 떠났다.

가벼웠고, 튀는 색 덕분에 가방 속에서도 쉽게 눈에 띄었다.

자동 노출, 자동 감기, 자동 되감기.

생각 없이 툭툭 셔터를 눌러도

실내와 외부의 명암 차이를 자연스럽게 넘기는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파인더는 정보가 없는 단순한 구조였지만,

작은 셀프타이머 램프와 전면 렌즈 아래 위치한 스위치의 조작감은

오히려 필름카메라 특유의 물리적 감각을 되살려주었다.

IMG_7179.jpeg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파인더

렌즈의 성능은 솔직히 기대 이상이었다.

실내에서도 노이즈 없는 묘사,

외부에서는 살짝 눌린 대비감 덕분에

사진 한 장이 그 자체로 톤 필름 같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생각 없이 찍을 수 있는 카메라, 그 이상의 가치


이 카메라는 지금도 가끔 꺼내 쓴다.

특별한 기능은 없고, 렌즈도 특별하진 않지만,

가볍고 고장 나지 않고,

무엇보다 ‘생각 없이 사진을 즐기기 딱 좋은’ 구성이기 때문이다.


귀엽고 가벼운 외형,

뚱뚱하지만 존재감 있는 실루엣,

진득한 색감과 담백한 결과물.


그 모든 것이 모여

이 코니카 Top’s는 나만의 여름 기억 한 조각처럼 남아 있다.


008120330012250812.jpg 한낮의 뜨거운 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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