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거인의 숨결

나오카 2nd - CONTAX RTS. 004

by hongrang

Contax RTS, 콘탁스의 첫 깃발


찌이이익, 철컥.

셔터음이 공기를 찢고 나면,

마치 오래된 시계탑에서 울리는 종소리처럼

과거의 어느 시점이 조용히 깨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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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동 셔터의 저항감,

미러의 충격, 그리고 고요한 울림.

그 낯설지 않은 떨림은

시간을 걷는 기계와, 그 기계를 바라보는 나 사이의 신호였다.

“139와 RTS, 왜 나는 두 개를 함께 소유하게 되었을까?”


처음부터 둘 다 원했던 건 아니다.

139 Quartz는 작고, 가볍고, 기능이 많았다.

내 손에 잘 맞았고, 무엇보다 셔터음이 ‘딸깍’하는 감정을 자극했다.


RTS는 그에 비해 크고 무거웠다.

조작도 묵직했고, 어떤 인상은 애매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는 알게 됐다.

139는 RTS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RTS는 1975년, 콘탁스의 첫 깃발이었다.

‘Real Time System’의 약자였고,

야시카와 자이스, 포르셰 디자인 스튜디오가 협력한

전통적 수동 SLR의 결정체였다.


이 둘은 단순히 다른 기종이 아니라

같은 시간의 다른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두 얼굴을 동시에 마주하고 말았다.

“기계가 주는 신뢰란 어떤 감정일까?”


RTS는 전자적 기능보다도

기계 자체의 질감과 정직함으로 승부하는 카메라다.


짜이즈 렌즈가 없던 나는

펜탁스의 50mm f1.8 M42 렌즈를 어댑터로 마운트 했다.

조리개 연동은 안 되었지만,

측광은 정확했고, 노출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008120340006250812.jpg 해지는 월영교에서 도시를 바라본다

정오의 그늘에서도,

측광계는 예상보다 훨씬 정확했다.

과노출도, 언더도 없었다.

필름의 관용도를 믿고 찍는 데 전혀 망설임이 없었다.


셔터음은 단정했다.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안에는 뭔가 믿을 만한 기운이 있었다.


이건 단지 ‘작동’하는 기계가 아니라

내가 사진을 찍는다는 행위를 인정해 주는 듯한,

그런 존재였다.

“시간은 왜 흔적을 남기는가?”


이 카메라의 외피는 한때 부드러운 가죽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손가락으로 살짝만 문질러도

가루처럼 부서져 내리는 상태다.

인조가죽은 시간이 오래되면 스스로 흘러내린다.

마치 기억의 표면이 벗겨지는 것처럼.

직접 시트를 씌우는 대신

나는 스티커 한 겹으로 감쌌다.

이 바디는 언젠가 내 손을 떠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지금의 이 거친 외형조차,

그 자체로 이 카메라의 정직한 초상처럼 느껴졌다.


파인더엔 약간의 먼지가 있었지만

시야는 흐리지 않았다.

모든 기능은 조용하고 부드럽게 작동했다.

오랜 세월, 수많은 손길을 지나왔을 이 기계는

아직도, ‘작동’이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들려주고 있었다.

“콘탁스는 정말 거품 브랜드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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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하늘 한가운데 정점을 찍고 있었지만,

우리는 깊은 나무 그늘 아래 있었다.

고요하고 투명한 작은 수영장,

자잘한 반사광이 수면 위를 떠다녔고,

그 속에서 당신이 물을 튀기며 웃고 있었다.


그날 나는 콘탁스 RTS를 들고 있었다.

M42 어댑터로 펜탁스 50mm F1.8을 마운트 한 채.

플래그십이라 불리는 이 카메라가

그 순간만큼은 내게 사적인 기록자가 되어주었다.



알록달록한 베이비핑크 수영복,

그 선명한 색감이 물속에서 묘하게 부유하고 있었고,

당신의 스킨톤은 그 위에 또렷이 분리되어 떠올랐다.


그늘진 물빛은 초록과 푸름 사이의 미묘한 경계에 있었고,

RTS는 그 물색을 탁하거나 붕 뜨지 않게 정확히 잡아주었다.

노출은 명확했고,

피부 위에서 또르르 흘러내리는 물방울조차

질감이 느껴질 만큼 섬세하게 묘사되었다.


셔터는 부드럽게, 하지만 정확하게 떨어졌다.

찰칵.

그 소리는 그날의 햇살만큼이나 조용하고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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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위로 당신이 웃었다.

빛이 닿은 어깨 위로 작은 방울들이 흘렀고,

그 순간, 콘탁스 RTS는

빛과 물과 감정을 하나로 엮어주는 기계처럼 느껴졌다.


135mm 렌즈도, 85mm 렌즈도 아니었지만,

50mm의 시선은 딱 적당했다.

과하지 않고, 부족하지 않은 거리.

당신을 멀리서 바라보는,

하지만 그 안으로 스며드는 온도의 시선.


그날의 필름을 스캔했을 때,

나는 의심을 품지 않았다.

이 조합이 맞았다.

콘탁스 RTS와 수동 펜탁스 렌즈,

그리고 빛과 그림자, 피부와 색채의 밀도

그 어떤 카메라보다도 명확히 표현해 주는 이 기계.


빛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지만,

그 빛을 받아들이는 기계가 그날을 작품으로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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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도 그 장면을 기억할까?

나는 그날의 공기와 물소리,

그리고 당신이 반짝 웃던 순간의 사진을

지금도 한 장의 프레임으로 꺼내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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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아래,

RTS라는 이 기계가 조용히 적혀 있다.

마치 그날의 한 귀퉁이에 조용히 함께 있었던

한 명의 동행자처럼.


처음 내가 사용했던 콘탁스는 N1이었다.

교세라 시절의 전자동 SLR.

솔직히, 기능은 많았지만 진심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브랜드만 남고 철학은 흐려진 느낌.


하지만 RTS는 달랐다.

포르쉐 디자인의 조형,

자이스이콘과 야시카의 기술,

그리고 수동 조작이 주는 긴장감.


이건 명성을 위한 기계가 아니라,

기술을 위한 철학의 결과였다.


라이카 R 시스템에 정면으로 도전하기 위해 태어났고,

지금은 그 역사의 무게를

몸소 감당해내고 있는, 오래된 거인.

축제의 불빛이 하나둘 들어오는 여름밤,

나는 여전히 후지 200 필름을 끼운 RTS를 들고

조용히 셔터를 누른다.


그 순간, 어떤 기계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는 그 기계의 숨결을 통해

사진이라는 시간을 한 장 더 살아낸다.


008120340014250812.jpg 월영교의 축제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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