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업이라는 이름의 주인공, 그리고 도쿄의 회색빛 아침

나오카 2nd - NIKON EM. 003

by hongrang

작은 위기를 위한 준비, 그리고 카메라의 순서가 바뀌던 순간 – Nikon 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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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kon EM.

1980년 3월 1일, 일본 내수용으로 출시된 이 카메라는

보통 니콘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리틀 니콘’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가장 단순하고, 가장 가볍고, 무엇보다도 가장 ‘자동’에 가까운 니콘.

니콘답지 않다는 평이 많지만,

그 특유의 경박단소함이 내겐 오히려 선택의 이유가 되었다.


EM은 니콘답지 않게, M 모드가 없는 SLR이다.

조리개 우선 자동노출만 지원되고,

수동 셔터 속도는 기계식 1/90초 딱 하나.

노출을 바꾸고 싶다면 ISO 다이얼이나 노출 보정으로 꼼수를 써야 한다.


하지만, 이 단순함이 좋았다.

오히려 ‘고민 없는 촬영’이라는 자유를 주었다.


게다가 F 마운트는 여전히 유지되었고,

렌즈는 ‘E Series’라는 전용 라인업이 함께 출시됐다.

작고 가벼운 싱글 코팅의 저가형 렌즈.

이번 여행에서는 그중에서도 작고 날렵한 28mm F2.8 E 렌즈를 사용했다.

작지만 역광에도 강하고, 은근히 선명한 색감을 가진 렌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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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이이익, 툭.

작고 날렵한 셔터음이 가슴을 통과한다.

이 카메라는 늘 조용히 있다가,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제 몫을 다해낸다.


짐은 이미 무거웠다.

라이카 M3, 15mm 초광각 렌즈, 여러 롤의 필름, 삼각대 없이도 흔들림을 줄일 수 있는 고속 필름까지.

나는 긴 일본 여행을 앞두고 있었고,

그 여정이 나에게 백업 카메라를 떠올리게 했다.


그 백업은 Nikon EM.

작고 가볍고, 기능이 단순하고, 그러면서도 니콘이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를 가진 카메라.


그저 혹시 모를 상황을 위해 넣어둔 ‘예비’ 장비였다.

하지만 나는 곧 알게 된다.

여행의 기억이란, 늘 ‘예정된 주인공’이 만들어주는 건 아니란 걸.

카메라가 떨어진 그날, 여행의 방향이 바뀌었다


둘째 날, 나는 도쿄의 오래된 호텔에서

체크인 도중 M3를 대리석 바닥에 떨어뜨렸다.

손끝에 닿는 감각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파인더는 이탈됐고, 초점과 구도를 확인할 수 없게 됐다.

내가 상상하던 여행의 풍경은

그 순간, 사라진 듯했다.


그때 꺼낸 게 Nikon EM이었다.

가방 한편에 조용히 있던 작은 바디,

그리고 마운트 되어 있던 28mm E 시리즈 렌즈.

032100170011.jpg 지하철에서도 정숙하게

그날부터 EM은 예비가 아닌 메인이 되었다.

도쿄의 흐린 하늘 아래에서

나는 도쿄를 여행했다.

비는 오지 않았지만, 하늘은 흐렸고

햇빛은 건물들 틈으로 어색하게 부서졌다.


032105190033.jpg 성년의 날이었는지 전통의상을 한 어린 친구들이 자주 보였다.

츠키지 시장의 아침은 늘 그렇듯 생생했다.

작은 칼, 얼음 위를 스치는 장화,

잔뜩 김이 서린 안경 너머로 나를 바라보던 노인.


사람들 사이에서 EM은 나를 방해하지 않았다.

가볍게 꺼내어 셔터를 누르면

찌이익, 작은 소리 하나로 기록이 시작됐다.

무겁지 않았고, 복잡하지 않았다.

가게 사이 골목길의 반사광,

기름기 낀 노면의 어둠,

그리고 어딘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이들의 옆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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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안,

나는 문 옆에 서서 카메라를 가슴께에 고정한 채

조용히 셔터를 눌렀다.

마주 보며 잠든 사람들,

고개를 푹 숙이고 책을 읽던 여고생,

전화기의 액정만 밝게 빛나던 남성의 손.

모두, 이 작은 바디 안에 고요하게 담겼다.

센소지, 무거운 공기 속 집중

아사쿠사에 도착했을 때,

센소지의 돌바닥은 어두웠고,

하늘은 여전히 무채색이었다.

하지만 그 흐린 빛은

오히려 인물과 공간을 분리시키는 이상적인 조명이었다.


나는 카메라를 가슴에 붙이고 조용히 걸었다.

‘찍는다’는 의식 없이,

그저 바라보고, 누르고, 멈췄다.

032100150017.jpg 우에노공원
032100150020.jpg 공원 근처에는 사람들과 함께 새들이 휴식을 취한다.
032100150024.jpg 검은색 새였다.
032100150025.jpg 강변의 포장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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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파인더는 내 시야를 제한했지만,

그 덕분에 더 깊게, 더 정밀하게 보게 되었다.

기계의 단순함은 오히려 집중의 깊이를 만들어줬다.

작은 기계가 남긴 거대한 기록

IMG_7777.jpeg 니콘의 EM 파인더

여행은 끝났고,

돌아온 후 스캔한 필름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날의 공기와 거리의 냄새,

마스크를 쓰고 어깨를 움츠렸던 사람들의 무표정,

그리고 흐린 하늘 아래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 상인의 눈빛.


그 모든 순간에

M3가 아닌 EM이 있었다.

예비 카메라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니콘 EM은,

누군가에겐 ‘리틀 니콘’,

누군가에겐 ‘기능 미달의 자동카메라’ 일지 모른다.


하지만 내게 있어 이 카메라는,

도쿄의 회색빛 아침과

시장과 지하철의 사람들 사이에서

묵묵히 제 역할을 해낸 조용한 조력자였다.


그리고 그날의 기억은,

지금도 작고 투명한 프레임 안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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