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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직한 마술상자

나오카 3rd - Nikon TW Zoom35-70.

by hongrang
009260170006250926.jpg 길고양이 주제에 너무나 귀여운 호랑이

틱, 찌이이이잉


처음 이 카메라를 손에 올려놓았을 때,

나는 단박에 ‘벽돌 같다’는 말을 입 밖에 꺼냈다.

니콘 TW 줌 35–70.

정말이지, 손안에 들어온 마술의 벽돌 같았다.

흉기처럼 마구 찍어버릴 것 같은 흉폭한 오브제.


P&S(포인트 앤 슛)라고 하기엔

너무 크고, 너무 무거웠다.

하지만 그 묵직한 존재감은

이 카메라를 믿게 만드는 묘한 신뢰감을 품고 있었다.

던져도 부서지지 않을 것 같은 내구성은 담보될 것 같았다.

IMG_9733.jpeg 존재감 있는 플래시


세련됨과 클래식의 경계에서


TW 줌은 1990년대를 대표하는 하이엔드 콤팩트 필름 카메라 중 하나다.

미묘하게 미래적인 외형,

묘하게 다프트펑크 헬멧을 닮은 전면 디자인,

정제되지 않은 듯한 곡선과 두께.

모든 것이 애매하지만,

그래서 더 특별하다.


니콘의 카메라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그립 부분의 붉은색 라인이 떠오른다.

TW 줌에도 역시 그 포인트가 살아 있다.

F3 이후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는 니콘의 시그니처 디자인.

붉은 선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니콘다움’을 상징하는 유전자의 흔적처럼 느껴진다.

손끝에 스치며, 그 시대의 필름 냄새와 함께 니콘이 추구했던 진중함을 떠올리게 한다.

IMG_9732.jpeg 니콘의 아이덴티티 그립부의 레드포인트

사실 니콘은 나에게

렌즈교환식 카메라 브랜드로 더 익숙했다.

FM2, F3 같은 전설적인 기계식 카메라들.

혹은 35Ti 같은 감성의 정점에 있는 고급 P&S.


그에 비해 TW 시리즈는

조금은 무심하게 지나쳐온 모델이었다.


마주한 건 불안정한 전원,


그럼에도 눌러본 첫 셔터

내가 가진 TW는

조금 상태가 애매했다.

전원이 왔다 갔다 했다.

어디가 문제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써보자는 마음으로 필름을 넣었다.

009260170030250926.jpg 각기 다른 파란색을 명확하게 구분해 준다.

셔터는 가볍지도,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았다.

줌 기능은 부드럽게 움직였고

AF는 꽤나 정확했다.


이 카메라는 당시 니콘의 하이엔드 콤팩트 모델로,

35~70mm 줌 렌즈를 탑재하고 있다.

겉모습만 보면 투박하지만, 내부엔 자동 초점, 스팟 AF, 무한대 초점,

플래시 제어, 셀프타이머, 적목 감소 등 웬만한 기능이 모두 들어 있다.

다만 흥미로운 점은, 이런 편의 기능을 넣으면서도 휴대성을 위해 크기를 줄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콤팩트 카메라는 작고 가볍게 만드는 과정에서 ‘촬영 안정감’을 희생한다.


하지만 니콘은 그 타협을 거부했다. 오히려 손 안의 무게감으로 안정된 프레이밍을 유도했다.

결과적으로 TW 줌은 작지도,

가볍지도 않지만, 묘하게 ‘사진을 잘 찍을 수 있을 것 같은 카메라’가 되었다.



여행을 위한 마술벽돌


TW 줌은 결코 가볍지도, 작지도 않은 카메라다.

하지만 묵직하다는 건, 그만큼 안정감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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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파란색도 차분하게 잘 잡아주었다.

가벼운 캠핑이나 짧은 여행.

빠르게 꺼내어 셔터를 누르고

다시 넣기엔 무리가 있지만,

마음먹고 이 녀석 하나만 메고 간다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결과를 안겨주는 바디다.


필름을 현상했을 때, 프레임 속엔 묘하게 안정된 시선이 있었다.

흔들리지 않은 수직선,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는 고양이.

‘아, 이래서 무겁게 만들었구나.’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사진은 결국, 안정된 손끝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을.

009260170027250926.jpg 순간을 잡아주는 포커스가 제법이다.

작은 소리로 구동되는 줌,

느리지만 정확한 포커스,

그리고 묘하게 강인한 존재감.


이 카메라는 ‘예쁘다’보다는

‘믿을 수 있다’는 감정으로 남는다.


마술상자, 한 장씩 꺼내는 기억들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갔을 때

사람들은 내 손에 들린 그 덩어리를 힐끗 쳐다보곤 했다.

“요즘에도 저런 거 쓰는구나.”

그 시선에는 약간의 경외감과 약간의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

009260170012250926.jpg 흐린 날 차분한 채도

렌즈를 바라보며 셔터를 누르는 순간,

나는 마치 과거의 기술을 들고 미래를 찍는 듯한

기묘한 시간 속에 있었다.


콤팩트의 탈을 쓴 벽돌,

하지만 기능은 예민하고,

사진은 깊고 또렷하다.

이 카메라는 나에게

‘불완전한 기계도 믿음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줬다.

전원이 언제 꺼질지 몰라도,

한 장 한 장 필름을 넘길 때마다

그 속에 담긴 장면은 생각보다 더 또렷했다.

009260170021250926.jpg 불안한 전원이 주는 색다른 사진 -원치 않는 다중노출

사진은 결국 완벽한 카메라가 아니라,

그 순간을 믿고 셔터를 누르는 사람이 만든다.


지금도 책장 한편에 이 벽돌 같은 카메라가 놓여 있다.

검은 바디 위로 선명하게 남은 붉은 포인트.

그것만으로도 니콘의 자존심이 느껴진다.

요즘의 디지털카메라가 잃어버린, 무게와 신뢰의 미학.


니콘 TW 줌은 그것을 잊지 말라고 말하는 듯하다.


009260170008250926.jpg 요망한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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