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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의 경쾌함, 하만 디스포저블

나오카 3rd - HARMAN_B&W_camera XP2 400

by hongrang
010140130005251014.jpg 비 오는 흐린 날 걸어가면서 찍어도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다.
010140130006251014.jpg 그 누구도 이 카메라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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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빠른 자동차는 무엇일까.

아마 자동차 마니아라면,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른다.

“렌터카죠.”


영국의 ‘탑기어’ 방송에서 나왔던 이 유쾌한 농담은 내게 꽤 오래 남아 있다.

렌터카는 내 것이 아니기에,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해 망설임 없이 액셀을 밟을 수 있다.

손상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한계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 자유.

반면 자가용은 조심스럽다. 모서리를 스치면 마음도 긁히고, 작은 흠집에도 가슴이 쿡쿡 아프다.


이 뜬금없는 비유를 꺼내는 이유는,

여행에서의 카메라도 꼭 그렇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나는 그 비유의 끝자락에서 이 이야기를 꺼내고 싶었다.

하만의 1회용 흑백 카메라 = 렌터카처럼 가볍고, 빠르고, 자유로운 이 작고 붉은 기계에 대해서.

여행 사진의 최고 파트너는 무거운 SLR도, 감성적인 중형 카메라도 아니다.

모든 것을 품은 스마트폰도 아니고, 값비싼 수동 필름카메라도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여행용 카메라는,

1회용 카메라다.


그중에서도 오늘 손에 올린 하만의 1회용 카메라는,

흑백이라는 이유로 많은 이들이 망설이지만,

내겐 그 망설임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카메라다.

이 카메라의 붉은 플라스틱 바디는 어느 한쪽에도 기울지 않는다.

전문가를 흉내 내지도 않고, 완전한 장난감도 아니다.

마치 거리의 경쾌한 악사처럼, 어딘가로 향하는 발걸음을 가볍게 만들어준다.


스펙을 따지자면 단출하다.

렌즈 밝기는 f/9에서 f/11 사이, 셔터속도는 1/100초 고정.

일포드 XP2 흑백 필름 400 ISO가 27컷 들어 있고,

내장 플래시 하나가 전부다.


그런데 그것이면 충분하다.

이 카메라는 ‘기억’을 찍는 도구니까.

’ 정확한 장면’보다 ‘흐릿한 기분’을 담아주는, 가장 순수한 감각.

작은 가방 속에 무심히 넣고 서울을 걸었다.

늦여름과 초가을의 경계선.

노란 은행잎이 떨어지고, 사람들의 셔츠 사이로 바람이 스치던 오후.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셔터를 눌렀다.


놀랍게도, 모든 것이 잘 맞았다.

흐린 날에도 노출은 안정적이었고,

조명이 없는 실내에서도 한 컷쯤은 남겨둘 수 있었다.

심지어 셀프타이머도, 수동 조작도 없었지만

사진은 거짓 없이 지금을 정직하게 받아 적었다.

여행에서는 변수가 많다.

빛이 들지 않는 골목, 급히 마주친 풍경, 짐에 눌린 렌즈.

무거운 카메라와 여러 렌즈를 꺼내 놓기에는 시간이 아깝고,

무언가를 준비하는 사이 놓쳐버리는 장면이 더 많다.


010140130008251014.jpg 비 오는 초저녁 우산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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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140130010251014.jpg 거의 조명이 없는 실내
010140130011251014.jpg 오랜 시간 함께 한 후배
010140130013251014.jpg 좁은 실내에서 플래시는 반사와 함께 충분한 광량을 보장해 준다.


그럴 땐

이 작은 하만 흑백 카메라가 내게 가장 큰 자유를 주었다.

한 손에 커피를 들고도, 다른 손에 이 카메라만 있다면

순간은 그대로 나의 것이었다.

부서져도 좋고, 잃어버려도 크게 아프지 않으며,

누구에게든 셔터를 맡겨도 일정한 결과물을 안겨주는 것.


이건 ‘기록의 권한’을 여행의 동반자들과 나눌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혼자가 아닌 여행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닌 ‘함께 보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건 이 1회용 카메라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무엇보다도,

이 카메라는 흑백이다.


흑백 사진이 주는 정적의 미학은

컬러보다 훨씬 더 많은 여백을 만들어준다.

빛과 그림자, 질감과 거리, 흐름과 멈춤.

그 모든 것들이 색을 덜어내고 오히려 감정을 더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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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140130024251014.jpg 자동차 안 뒷좌석에서 앞을 찍는데도 콤팩트한 스냅 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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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만 XP2 필름은 흑백이지만 C-41 일반 현상으로도 처리 가능하다.

흑백 특유의 계조를 느낄 수도 있고,

가벼운 마음으로 근처 현상소에 맡길 수도 있다.

현상 시간도 짧고, 비용도 덜 든다.

이 점은 초심자에게도, 여행자에게도

정말 큰 장점이다.

누구에게나 첫 흑백 필름 카메라가 있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 작은 카메라를 추천하고 싶다.


기술은 낮지만 감정은 풍부하다.

속도는 느리지만 마음은 빠르다.

기억은 선명하지 않지만, 감정은 또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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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0140130030251014.jpg 완벽한 스냅머신 30mm

여행의 기억이란 원래 그런 것 아니던가.

다 남기려 하지 말고, 하나쯤 흐려지게 두는 것.

선명함보다 여운이 남는 장면을 고르고,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감각까지 안고 걷는 일.

그게 필름의 매력이고,

그중에서도 1회용 카메라만이 주는 가벼운 진심이다.

나는 지금도 여권 옆 주머니에 이 카메라를 넣고 다닌다.

언제 찍을지 모르지만,

언제든 셔터를 누를 준비는 되어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 사진들이 내가 기억하지 못한 어떤 순간을

나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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