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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한 장만 읽자는 마음, 130권의 독서가 되다

책은 어떻게 인생을 바꿀까? 끈질기게 책을 놓지 않은 2년의 기록.

by 수우수


1) 책을 만남


인생 최고의 방황을 겪어본 적 있습니다. 끝내주게 긴장 넘치는 커다란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려 어푸- 어푸푸하며 짜디짠 물을 잔뜩 먹어도, 마냥 신이 나고 하늘 끝까지 날아오를 만큼 자유로운, 그런 방황입니다. 때는 2023년의 이른 봄이었고 이곳저곳 전전하던 회사를 퇴사했고 세 번째 사계절을 함께 보내려던 남자친구와도 끝을 맺었던, 무직의 솔로인 20대 후반의 여성. 결국 완벽히 비정상 궤도에 올라버렸지만, 저는 어째서인지 이제야 비로소 모든 일이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고 느꼈습니다. 저에게는 그 모든 것이 미묘하게 사이즈가 안 맞아 불편한 하이힐, 어울리지도 않고 단점만 부각하는 원피스 같아서 그것들을 입은 저는 어디에 가든 워스트 드레서가 되어 힘겹게 걷는 기분을 느끼곤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시기를 보내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행위가 우선 '마음껏 책 읽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내일 출근해야 할 부담 없이, 주말을 누군가와 함께 보내야 하는 제약 없이 하루 종일, 종일, 종일, 책만 읽을 수 있습니다. 하루의 가장 커다란 신경이 오직 책에 있습니다. 먹고 자고 기타 잡다한 일들은 책을 읽지 않는 '그 외 시간'에 해결할 뿐. 한 달 내내 한 일이라곤 읽고 싶었던 책들을 제대로 읽은 것 외에는 출근도, 친구도, SNS 교류도 없는 삶. 실제로 저는 퇴사와 이별 후에, 벼르고 벼르던 일을 해치우는 몹시 후련한 마음으로 카카오톡을 지워버렸지요. 단순히 어플만 지웠다 깔았다 하는 게 아니라 완전 탈퇴-! 기록도 남김없이! 크하.


저의 새로운 천지개벽을 활짝 열어준 첫 번째 책은 독일계 스위스인 작가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였습니다. 이 책은 몇 해 전 <책 교환 프로젝트>라는 유익한 유행에 참여해, 모르는 다정한 이로부터 선물 받은 책이었습니다. 몇 년을 책장에 고이 묵혀두었다가(!) 2023년, 유물을 발굴하듯 꺼내든 책이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손이 갔습니다. 시선을 천천히 옮기며 책의 문장과 문장, 하나하나의 단어마다 꼼꼼히, 꼭꼭 씹어 소화하듯 읽게 만드는 헤르만 헤세의 문체와 세계관을 처음 맞닥뜨렸습니다. 영혼이 담긴 두개골 위로, 뇌 위로 신성하고 아름답지만 소스라치게 차가운 성수를 끼얹는 기분이었습니다. 《수레바퀴 아래서》에 등장하는 한스라는 소년, 총명하고 남다른 영혼을 가졌지만 그 섬세함으로 인해 쉽게 다치고 상처받아 세상의 압박을 극복하지 못하는 인물에게서 나의 일부분을 느끼기도 하고, 감탄스러운 자연에 대한 묘사에 영혼이 치유받는 크고 깊은 감동을 느꼈습니다. 그 감정은 무척 오랜만에 맛보는, '건강한 진짜 도파민'에 젖어드는 감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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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책과 여행함


책 읽는 일이 재밌어지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이어 헤르만 헤세의 또 다른 소설책인 《데미안》까지 연이어 읽었습니다. 사이에 읽은 밀란 쿤데라의 책도 몹시 재미있었던 덕분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데미안》을 읽고 저의 어떤 한 세계가 와르르 무너졌다가, 새롭게 세워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천지개벽 같았습니다. '이런 세상이 존재한다고?' 너무나 새로운 세계인 동시에, 모든 문장을 받아 적고 싶어 졌을 정도로 이해와 공감을 받는 기분을 느꼈지요. 헤르만 헤세가 100년 전에 적었던 오래된 문장들인데도, 읽는 순간 이것들이 이미 내 머릿속이나 마음 깊은 곳에 새겨져 있었고 아주 오래전부터 내 뿌리 깊은 끝에서 통하고 있었다는 충격에 가까웠습니다. '감동'이라는 말로 담을 수 없는 흥분과 두려움을 포함한 감격, 심장이 위아래로 덜컹이고 책을 쥔 손에 힘을 주는 것이 어려운 떨림. 가짜 이름으로 소설 《데미안》을 발표했던 헤르만 헤세를 바로 눈앞에 두고 둘러앉아 온기를 느끼고 눈을 똑바로 마주치며 대화를 나누는 기분, 헤르만 헤세와 끝없는 대화를 종알종알 나누며 모든 순간에 "내 말이 그 말이야!"라고 탄성을 지르는 마음으로 책을 한 장 한 장 읽어나갔습니다. 누군가와 너무 밀접하게 마음을 나누면 갑작스레 영문도 모르고 왈칵 눈물을 쏟듯이 책을 잡고 아이처럼 울며 웃으며 문장을 따라 적은 순간도 많았습니다.


《데미안》은 저에게 분명히 용기를 불어넣었고 확실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밖으로 나가야 한다. 더 멀리 가봐야 한다. 내 작은 세상 바깥에 무엇인가 있다.'라는 생각에 사로잡혔고, 홀린 듯 일본의 미술관들을 검색해 빠른 속도로 비행기 표와 숙소를 예약했습니다. 그렇게 봄이 다 가기 전, 저는 미술관 여행을 하러 도쿄에 홀로 떠나 이 주일 정도 그림을 그리고,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 용기 있는 여행의 감상을 이곳에 다 적는 것은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겠지요... 무척 좋았고 자유했다는 감각과 아름다운 필름카메라 사진들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창밖에서 낯선 일본어가 간간이 들려오는 숙소의 밤, 혼자 침대에 누워 헤르만 헤세의 소설집 《청춘은 아름다워》를 읽었습니다. 이런 방황이라면 제법 해볼 만하다, 아무것도 약속할 수 없는 인생이었지만, 영혼은 안전한 곳에 안식하고 있음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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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교환 프로젝트> 당시 책과 함께 받았던 손편지. / <<데미안>>을 여러 번 읽었다. 좋은 문장을 필사한 흔적.


마음이 자유를 맛보면 멈추기를 모르는 법. 따뜻해진 봄을 따라 박경리 문학의 집이 있는 원주에 가서 박경리 선생님이 머무시던 뜰을 보고 오고, 안도 타다오의 뮤지엄산에도 발자국을 남겼습니다. 다음 주에는 광주에 가서 비엔날레의 모든 파빌리온 전시들을 감상하고 오롯이 여행지와 나만 존재하는 충만함을 누렸고, 그다음 주에는 강릉이었습니다. 어느새 여름이었고, 휴가를 즐기러 온 관광객 가족들 사이에서 혼자 타월을 깔고 누워 책을 읽었습니다. 그때 읽은 책은 유지혜와 이슬아의 책이었지만, 저와 함께 했던 정신은 책 《데미안》에서 나온 것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소울 메이트이자 믿을 수 있는 멘토, 취향과 관심사가 겹치는 든든한 친구로서 제가 스스로 만든 틀을 깨부수고, 다시 새로운 틀을 만들고, 또 깨부수고 매번 더 먼 곳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저를 격려했습니다. 저는 여전히 《데미안》이 내미는 손을 꼭 잡고 걷고 있습니다. 이 변화와 믿음의 경험으로, 언제든 새롭게 충격받고자 다른 책들에 대해서도 열린 눈과 마음을 갖고 조금씩이라도 계속해서 읽는 일을 이어오게 되었습니다.



3) 책과 살아감


헤르만 헤세를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니체가 남긴 글들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초역 니체의 말》, 《니체와 함께 산책을》, 《사는 게 힘드냐고 니체가 물었다》와 같은 책들을 읽으면서 SNS를 극단적으로 줄이는 결심을 했습니다. 요즘의 SNS에 너무 매몰되어 진짜 나의 삶에 전념하고 온 마음으로 몰입, 몰두하는 투명한 시간을 서서히 잃어버리고, 유쾌하게 기뻐하고 진심으로 감사하는 정신을 잊고 살아왔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자연의 광대함, 고요함, 햇빛을 사랑'하며 하루에 여덟 시간을 자연에서 산책 등으로 시간을 보내며 일종의 명상을 했는데, 그 정도까지는 못 하더라도 할 수 있는 선에서 2G 폰을 사용하고, 숏폼 콘텐츠를 소비하지 않은 여름과 가을, 겨울, 봄을 보냈습니다. 이 과정을 거쳐, 저의 첫 번째 브런치 글인 '스마트폰 없이 제주로 내려가 생활하고 바다 수영을 한' 시기를 맞은 것입니다. 오래 걷고 매일 도서관엘 가고 책을 많이 읽고, 좋은 영화를 보는 것 말고는 딱히 하는 일이 없었던. 그것만으로도 빠듯한 느릿함으로 하루가 지던. 그 시기를 지나며 2023년에는 63권의, 2024년에는 78권의 독서를 기록했습니다. 전 해에 이어서 읽은 책들도 있고, 여러 번 거듭 읽은 책들도 있으니 다 합치면 130권 정도의 책을 잠시 품었을 것입니다.


한국의 젊은 작가들의 책과 환경, 인권과 관련된 과학, 인문 분야의 책들을 읽다 보니 거미줄처럼 읽고 싶은 작가의 폭이 줄줄이 넓어져 갔습니다. 어떤 작가의 책들을 거의 다 독파하고 다음의 흥미로운 작가로 넘어가는 형태의 독서 습관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달까지는 정세랑 작가님 책들을 이만큼 다 읽고, 다음 달에는 이 작가님 책을 읽어봐야지.' 하는 식으로요. 이전처럼 책이 일상의 모습들을 크게 변화시키기보다, 삶과 함께 걸어가는, 룸메이트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일어나서 몇 장 읽고, 자기 전에 몇 장 읽고, 이렇게 조금조금씩 읽어나가다 보면 책의 끝을 만나고, 책의 끝은 또 다른 책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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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에 mp3, 롤리팝이 왠 말이냐 !



읽은 책의 권수보다 중요한 것은 해가 거듭해도 '끈질기게 책을 놓지 않고, 마음이 계속해서 새로운 책의 세계로 나아가려 했는지'라고 스스로 되뇝니다. 누군가에게는 턱없이 좁고 짧은 독서 기록이지만, 그럼에도 끈질기게 계속해서 책을 읽었다는 점에서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달은 꽤 많이 읽고, 또 어떤 달은 상대적으로 적었습니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책을 읽을 수 있었던 비결, 그럼에도 독서를 영영 멈추지 않을 수 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읽고 싶은 책을 읽습니다. 궁금증과 흥미가 생기지 않은 책을 억지로 읽지 않았습니다.

읽고 싶은 만큼 읽습니다. 독서를 식사와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침을 조금 적게 먹으면 점심을 조금 더 든든하게 먹으면 됩니다. '오늘 조금 읽어도 괜찮아, 다음에 책이 더 배고파지면 그때 못 읽었던 만큼 더 많이 읽으면 돼!'


다음은 예외입니다. 책이 필요하다는 감각이 찾아오면, 읽기 귀찮아도 꼭 읽습니다. 이때는, '하루에 한 장만 읽어도 괜찮아'라고 생각합니다. 한 장만 읽자! 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쳐 들고 딱 한 장만 읽은 적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한 장만 읽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거부감을 스르르 녹게 만드는 것. '책이 필요한 감각'은 저에게 다음과 같습니다. 현실을 사느라 무언가를 잊고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듦 / 뇌와 머릿속에 안개, 구름이 잔뜩 낀 것 같음. 눈에 보이는 문제는 없으나 마음의 톱니가 잘 맞지 않는 기분이 듦 / 요즘 들어 무언가를 자꾸 깜박하고, 덤벙대고, 잔실수가 잦아짐 / 불평, 불만, 권태, 투덜거림, 비난, 미워 보임,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지 못함, 스스로 낮춤, 혹은 멀쩡한 남을 낮추거나 탓함. 책은 이 모든 걸 해결합니다. 사이다, 카페인처럼 시원하지만 부작용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보게 함으로써 나 자신에 매몰되지 않게 돕는 것 같기도 합니다. 책은 저에게 취향과 신념을 만들어주고, 그럼으로써 저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데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위와 같은 스트레스 해소까지 책임져주니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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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025년 독서 리스트



아 참, 책을 좋아하고 꾸준히 읽을 수 있었던 또 다른 비결은 '필사에 재미를 들인 것'입니다. 스마트폰이 없을 때 독서를 많이 하다 보니 좋은 부분을 사진 찍기보다 손으로 공책에 받아 적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스마트폰이 다시 생긴 지금도 좋아하는 책은 꼭 필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데, 책을 아날로그적으로 대하면 대할수록 더 깊은 애정이 생기는 것 같다는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2025년에도 책 읽기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나무에 대한 관심이 생겨 헤르만 헤세가 쓴 나무에 관한 책을 비롯한 자연에 관한 책들과 철학자들의 책, 한강 작가님의 소설들, 여러 시집들, 인도 배경의 헤르만 헤세 소설인 《싯다르타》를 읽었습니다. 지난주 주말에는 제주에서 열리는 큰 북페어에서 독립출판물도 여러 권 샀습니다. 저에게 독서는 저의 일부를 가꾸는 일 같습니다. 어떤 안경을 쓰고 어떤 옷을 입는 것이 더욱 나다울지 고민하며 거울 앞에서 이런저런 것을 써보고 입어보는 기분입니다. 저와 같은 것처럼 보이는 책 안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권은 읽지 못하지만, 하루에 한 장은 읽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얇고 끈질기게 읽어나가려고요.


여러분은 어떤 책을 읽고 계신가요? 어떤 책을 읽고 싶으신가요?


헤르만 헤세,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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