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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윤 Sep 01. 2022

그대의 페르소나에 숨 막혀하는 그대에게

뮤지컬, 쇼맨, 페르소나에 대해서

  '페르소나', 요즘 들어 익숙하게 느낄 사람이 꽤 많을 것 같은 단어. 숨겨진 또 다른 자아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동시에 '가짜'라고도 할 수 있는 또 다른 '흉내'. 살아가기 위해,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낙오되지 않기 위해, 함께 살기 위해 모조리 써낼 수 없이 더 많은 이유들로 모두가 가지고 있고, 가지고 있어야만 좋을 가면. '좋을 가면'이라는 것부터 페르소나는 태생이 나쁜 존재일 수 없다. 선택적인 존재가 아닌 필수적인 존재인 페르소나이니까. 그러나 그 가면에 스스로의 자유로운 호흡을 빼앗기기 시작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페르소나는 어디까지나 도구로 역할을 해내어 얼굴은 자유로워하며, 호흡은 온전히 나의 움직임에 따라 흘러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해야 한다. 계속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여전히 꾸준하게 생각한다. 생각해야 하기에 생각을 한다. 그럴싸한 이유를 두둑이 챙긴 채 페르소나에 기꺼이 손을 내민 순간부터 호흡의 온전한 주체자를 주시한다. 그러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인지도 아무것도 모른 채, 조용하고 확실하게 페르소나는 나를 간단하게 삼켜낼 테니까. 그건 정말 보장하는 건데, 썩 유쾌하지 않다.


  자신의 일생을 사진으로 남겨달라는 '네불라'의 요청, 그보다 먼저 들어왔던 그에 따른 꽤 쏠쏠한 대가. '수아'는 선뜻 그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 작업을 하며 그의 일생을 마주한 수아는 그에게서 소름 돋는 역겨움을 느낄 것을, 그에게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마주할 것이라는 것을 모른 채.

  네불라의 일생은 남들의 주목과 관심, 그들의 웃음 속에서 하는 광대짓, 그에게 최고의 황홀함인 그것들을 향한 갈망으로 가득하다. 정말 그가 그것을 진심으로 원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을 넘기 시작하면 결은 달라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그도 멈출 수 없을 만큼 그것을 향한 갈증을 느끼고, 결국엔 해서는 안될 비윤리적인 짓까지 해버린다. 바로 독재자의 대역. 그는 그의 대역을 충실하게 해내고, 나중에는 더 이상 하지 못하는 것에 파멸적으로 슬퍼한다. 그는 그 독재자를 향한 광적인 환대를 거절할 수 없었고, 그것들이 그를 살아 숨 쉬게 만듦과 동시에 목을 조른다는 것을 선명히 알고 있었다. 경멸하며 괴로워하지만, 놓지 못한다. 진저리 치며 외면해도 눈을 떼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증오하고 미워하고 괴롭힌다. 점점 자신을 삼켜내고 목을 쥐어짜는 페르소나에 그는 모든 저항을 포기한다. 결국 그는 남의 웃음에도 버려졌고, 스스로도 놓아서 버린다.

  그깟 페르소나를 벗어내지도 못하고 놓지도 못해서 스스로를 모두 먹혀놓고 결국 모두 갖다 버린 '네불라'의 일생을 마주한 '수아'는 알 수 없이 계속해서 올라오는 역겨움을 뱉어낸다. 그의 일생은 극도로 비윤리적이었고 이기적이었으며, 어리석음과 안타까움이 엉겨있었다. 대가를 이미 받은 수아는 억지로 네불라의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작업을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그런 그에게서 수아는 거울로 마주하듯 자신을 직면한다. 벗어나지 못한 끈적한 수아의 페르소나. 그를 향한 이유를 알 수 없던 역겨움은 사실 본인을 향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해외 입양아였던 수아는 사랑을 받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양부모는 원하는 것이 확실한 사람이었고, 수아는 기민한 아이였기에 모를 수 없었다. 양부모에게는 지적장애를 가진 딸이 있었는데, 본인들이 없을 때나 차마 채워주지 못하는 순간들을 수아가 책임져주길 바랐고, 어리도록 어린 수아에게 떳떳이 요구했다. 그러면 수아는 그들에게 칭찬을 들을 수 있었고,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가족으로 존재할 수 있었다. '굿걸', 수아의 페르소나였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것을 덤덤히 삼켜내는 것, 참아내는 것. 그래서 그에 따른 '굿걸', 그 한마디를 받아내는 것. 그가 버리지 못한, 얼굴에 무겁게 들러붙은 가면을 마주한다.


  그들을 보며 나에게 또다시 물었다. 생각했다. 나는 지금 나의 호흡을 가면으로부터 잘 지켜내고 있는가. 잘 어우러지고 있는가. 내가 알고 있던 나는 과연 정말 나인 걸까. 페르소나에 삼켜지는 것은 썩 즐겁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나의 짧고 지겨웠던 그 학창 시절에, 왜 그랬을까. 그들의 마음에 들고 싶었다. 더 노골적으로 얘기를 하자면, 마음이라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추상보다는 그저 여왕벌인 저 친구의 가장 친한 친구로 나란히 서있고 싶었고, 가끔은 그 친구의 시선을 따라 나도 내려다보고도 싶었던, 관계 속에 존재하는 하찮은 권력의 변변치 않은 맛을 보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그보다 작은 학교 안에, 더 작은 교실 안에, 더 작은 집단 속에 낙오되고 싶지 않은 생존 본능, 그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를 꾸몄다. 그들이 좋아할 법한 그럴싸한 모습으로 꾸며냈다. 물론 모든 것이 거짓은 아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진짜도 아니었고, 지금의 내가 두 가지를 저울에 기울어 보자면 거짓이 현저히 많았다는 것을 감히 단언할 수 있지만, 그때의 나는 모든 것이 진짜라며 그들을 속였고, 선을 넘어 나조차 속였다. 그게 정답 같았고, 어리석게도, 그래야 그들의 작은 마음이라도 얻을 수 있는 영광을 잠깐이라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으니까. 그 작디작은 집단에서 살고 싶던 악착같은 본능이었다.

  그럴수록 우습게도, 불안하고 초조했다. 페르소나에 차근차근 나의 호흡이 빼앗기고 있었다. 나의 중심은 오로지 그들로 채워지고 있었고 그럴수록 계속 위태로웠고 작은 바람결에도 휘청거리며 주저앉기를 반복했다. 아무렇지 않게 죽음에 갈증이 났고 그와 관련된 생각에 중독이 되었으며, 결국 간헐적으로 스스로 몸에 상처를 내는 식으로 숨통을 만들곤 했다. 결코 영원할 수 없는 잠깐의 위험한 숨통이라는 것을 알았어도 곧이어 따라오는 차분한 감정을 거부하기엔 어려웠다. 충분히 불안했고 위태로웠으며, 예상했듯 조금씩 나는 바스러져서 무너지고 있었다. 가면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나를 눌렀다. 내 속에 평온함이 담긴 숨결은 없었고 조용한 생각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 페르소나에 모든 호흡을 내어준 나는 어떤 흐름도, 방향도, 바람도, 어떤 작은 짐작도 할 수 없는 망망대해에 작고 낡은 땜목을 잡고 있는 상태와 같았다.

 

  그런 페르소나에 나를 분리했던 순간은 지극히 평범했다. 특별한 경험이 있던 것도, 누군가가 나타났던 것도, 어떤 계시와 같은 것이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들이 모두 사라진 그 순간, 현실의 나를 노골적으로 직시했던 순간이었다. 저 작고 지겨운 집단을 벗어나자 나에게 끝없이 펼쳐지는 시야와 다각으로 형성되는 관점, 그 시선을 가득 채우는 무한한 공간이 물 밀듯 밀려 들어왔다. 그 속에서 가면에 짓눌려 온 몸이 뭉개지고 짓물러져 바스러진 나를 마주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그들에게 받아내고 싶었던 것들은 사실은 나에게 바랐던 모든 것이었다. 나는 나의 마음을 얻고 싶었고, 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가지고 싶었고, 나의 인정을 받아내고 싶었고, 나를 굳건하게 잡아줄 주체성을 소유하고 싶었다. 온전히 나에게 갈망했던 것들. 한편으론 어리석고 안쓰럽게, 한편으론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그때의 나는 몰랐고, 가끔은 알면서도 외면하기도 했을 것이다. 간단하게 손에 잡힐 듯한 그들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들의 무언가로 나를 가득 채우고 싶어 하는 행위는 나를 마주하는 거울을 맹점들로 가득 채웠을 테니까. 그것들이 결국 찬란히 차오르는 나를 조잡하게 비워내고, 기어이 건조하고 푸석하게 만들어 바스러지게 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어렴풋이 감각하고 있음에도 계속 갈망했었다. 좁디좁은 집단만이 전부였던 일상에 있던 나에겐 그 방법밖에 없었으니까. 흔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건 추락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추락은 그 작은 집단 속에서 생존하기에 불리하니까.

  나를 알아갈수록 나는 자연스럽게 나의 페르소나를 알아야 했고, 알 수 있었으며, 그 모든 순간이 흥미로웠다. 무겁게 짓눌러 버거웠던 페르소나를 손에 올리고 무게를 가늠했다. 내가 가진 페르소나가 몇 개인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활용이 되는지, 어떤 역할을 수행하는지까지 차근차근 스며들고 있었다. 나를 삼켜내고 먹어대는 것이 아닌 물들듯 스며들고 있었다. 평온하고 평화로웠다. 찬란히 차오르는 충만함이란 감각, 그리고 갈망과 결핍의 본모습은 사실 열정이라는 것, 나까지 속이던 혼란만이 가득했던 페르소나가 사실은 나의 생존 본능을 이끌어 주던 유능한 또 다른 나의 자아였다는 것을 스미듯 나에게 왔다.

 

  그때의 나는 달라질 수 없다. 몇 번을 쓰고 고치고 다시 써도 결코 달라질 수 없다. 그때의 나는 그때이기에, 당연하게도 일말의 조각도 달라지게 할 수도, 달라질 수도, 다를 수도 없다. 하지만 지금의 내가 다르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다르게 만들 순 없어도, 다르게 안아줄 수 있다. 다르게 품어내고 바라보며, 다르게 사랑할 수 있다.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를 애틋하게 사모한다. 미련해하고 미워하고 경멸하고 괴로워하고 안쓰러워하다가 결국 충만하게 사랑한다. 스미듯 내가 된 그때의 나의 모든 순간을 누구보다 한없이 경애한다. 달라진 지금의 내가 달라질 수 없는 그때의 나를 다르게 만들어 새롭게 안아준다.


  난 너야. 내가 너무도 사랑하는 나야.


  네불라, 당신은 무엇을 위해 그렇게 숨을 참아냈나. 페르소나의 밀려드는 무게를 모든 뼈가 바스러지도록 받아내며 놓지 못한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나. 네불라를 향했던 질문들이 수아에게, 그렇게 수아에게 도달했던 질문들은 마치 테니스공이 벽이 치고 튕겨나가듯 관객들에게 도달한다.

  수아는 마지막으로, 나름대로 준비한 사진을 건네주기 위해 '네불라'를 만난다. 그리고 그에게 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은 단 한 장도 주지 않는다. 대신 그의 순간을 상징할 수 있는 사진을 준다. 그 사진엔 페르소나를 기괴한 표정으로 쓰고 괴음을 내며 몸서리치는 네불라는 없다. 그저 순간들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을 보고 그의 얼굴과 표정과 모습과 자신을 생각해내는 것은, 지금의 그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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