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윤 Aug 23. 2022

재능 때문이라는 변명

뮤지컬, 포미니츠, 뮈체와 제니

  그대는 재능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진짜 재능이란 뭘까요. 그것을 누가 어디서 어떻게 정의를 내렸으며, 정말 그 말은 어떤 모든 것을 보증할 수 있는 걸까요.


  적어도 나에게 재능이란, 단지 그건 너무 쉬운 나의 변명.

  변명,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너무나도 가벼운 그런 변명. 재능이란 단어는 나에게 핑계일 뿐이며 자신의 모든 죄를 알고도 꿋꿋하게 결백을 주장하는 추호의 무게도 되지 않는 자기변호. 재능이란 말은 나에게 그렇게 그러하고, 그동안 그러했다. 적어도 내가 재능이란 단어에 내린 정의는 자기변명의 다른 말이었고, 어디든 알맞게 들어가도록 재단할 수 있는 편리한 합리화였으며, 그저 해야 하는 것을 미루고 미루고 미뤄 결국 어떤 것도 하지 않는, 방관과 관조만 하는 끝없는 게으름과 나태에 대한 든든한 보증서였다. 혹은, 가장 나의 마음을 채우고, 마음에 차는 것만 취급하겠다는 같잖은 오만함을 부린 뒤 어김없이 뒤따르는 절망에 대한 자기 위로이기도 했다.

  '뮈체'의 눈물에 나의 눈물을 섞어 흘려보내고 나서, 날것으로 내뱉으며 고백하는 나의 비겁하고 지질한 단상.


  실 뮤지컬 '포미니츠'는 '제니와 크뤼거', 이 두 인물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살아남은 자들의 '살아'가 아닌 '남음'에 대한 이야기, 곧게 뻗은 활촉을 기꺼이 꺾어내 본인의 눈과 심장을 겨누며 자신의 여생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격렬히 벌하는 이야기. 이곳에 아직 다 하지 못할 정도 짙고 깊은 이야기를 관객들에게 던진다. 하지만 나에게 이 극은 '뮈체와 제니'로 남았다. 나에게 그들은 가장 짙은 향으로 남았고, 꽤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지속되는 잔향의 여운은 짙은 첫 향을 계속 코끝에 상기시켰다.

  극 속 '뮈체'는 피아노를 온 마음으로 품고 있지만 현실 속에선 고문관이다. 정돈된 복장으로 피아노에 손을 올리는 피아니스트가 아닌, 허리에 수갑을 차고 하루에도 수십 번 그 수갑에 손을 올리는 고문관. 그런 뮈체에게 교도소에서 교육차원으로 이루어지는 피아노 수업은 유일한 생기이다. 한 죄수의 부재로 생긴 빈자리에 뮈체는 괜히 가벼운 장난인 척 짧은 연주를 하고 '크뤼거' 선생에게 피아노와 연주 대회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단호하면서도 은근하게 보이며 자신의 몸을 부재된 자리에 슬며시 맞춰본다. 하지만 죄수를 대상으로 하는 수업에 교도소의 교문관인 뮈체는 업을 들을 수 없었고, 그 자리는 다른 죄수인 '제니'에게 돌아간다. 그러나 그 후에도 그 주변을 떠나지 못하고 여전히 맴도는 뮈체는 그 자리에 점점 스미듯 익숙해져 가는 제니가 괜히 더욱 눈에 밟힌다. 그렇게 곁을 맴돌던 뮈체는 제니의 자유롭고 유일한 헤엄을 듣게 되고, 그 움직임 속에서 제니의 유일한 바다선명히 본다.

  마음껏 헤엄치고 그렇기에 언제든 헤엄칠 수 있는 제니바다 본 뮈체는 절망한다. 헤엄치고 싶지만 헤엄치지 못하는, 아니 어쩌면 감히 헤엄치지 않고 있는 뮈체는 제니의 광활하고도 찬란한 바다그 속에서 자유로이 헤엄치는 제니를 보며, 그것을 가지지 못 함에 열렬히 경멸하며 증오하고,  황홀히 동경하며 존경한다. 그 순간을 뮈체는 말한다.

  '너의 바다를 꿈꾸고 상상해. 나도 너처럼 헤엄치고 싶지만 난 나의 바다가 있는지조차 모르겠어.'


  그런 뮈체에게서 나는 결국 나를 본다. 제니의 저것만이 내가 갈망하던 그 바다라고, 왜 나에게는 저 멋진 바다가 없을까, 나도 헤엄치고 싶은데, 왜 나는 헤엄을 칠 수가 없는 것일까 하고 어리석게도 재능을 원망하고 갈망하고 동경함과 동시에 재능을 너무 쉽게도 변명과 핑계 삼았던 그 어떤 누구나라면 했을, 그런 평범하고도 보통의 생각을 하던 나를 직면한다. 


  그렇게 재능에 대해 경멸과 동경의 눈물을 토해내던 '뮈체'의 목소리에 '크뤼거' 선생의 목소리가 엉켜지며 뮈체는 그제야 본인을 마주 보고, 그가 이제 나아가야 할, 나아갈 수 있는, 나아갈 길을 바라본다. 그는 그동안 '누군가'를 좇기만 했다는 것을, 바라만 보기만 했다는 것을. 스스로를 보고, 그렇게 스스로의 몸을 마주하고 그만의 움직임만으로 유일한 헤엄을 상상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헤엄을 담아낼 스스로의 바다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바라본다. 그동안 뮈체는 제니와 같은 유능한 누군가가 되기 위해, 그렇게 신미한 재능이란 것을 가진 누군가가 되기 위해, 그 누군가의 헤엄과 그 누군가의 바다만을 상상하고 생각해왔던 자신의 모습을 마주 본다. 크뤼거 선생은 이미 그런 뮈체를 보고 있었고, 그런 모습으로 본인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뮈체에게 그는 뮈체가 바라던 인정과는 너무나도 다른, 그래서 결코 그때의 뮈체는 받아내지 못하는 진정한 인정을 해준다.

  바로 남의 바다를 보며 남의 바다만을 상상하는 그에게, 다른 누군가의 바다에 매몰되며 결국 본인에게 '재능'이 아닌 '보통'이란 옷을 입히며 '바다'가 아닌 '가뭄'에 본인을 기어이 밀어내며 괴로워하는 그에게 크뤼거는 그만이 입을 수 있고, 그래서 그만이 잘 어울릴 수 있는 유일한 옷을 찾아주며 그렇게 진정한 인정을 한다. 아마 그는 뮈체가 그의 몸짓으로 그만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을 칠 수 있는 자라는 것도, 그리고 그것을 그가 곧 알아서 볼 것이라는 것도 확신하지 않았을까. 드디어 뮈체는 그의 몸이 밀물로 가득 밀려드는 듯 바닷물을 쏟아낸다.

  '네는 내가 아닌데 왜 난 너의 바다를 꿈꿨을까. 나의 바다를 헤엄쳐. 난 나의 바다를 상상해. 난 나의 바다를 헤엄쳐. 너와 똑같은 물고기처럼'


  '재능'이 도대체 무엇일까. '재능'이라는 것이 정말 있을까. 있다면 그것의 객관성 또한 보장되는 것이 확실할까. 그럼, 정말 그게 있다면, 진짜 있는 거라면, 나는 왜 없는 것일까. 정말 나는 없는 것일까.

  울며 웃는 듯, 토해내며 삼켜내는 듯, 절망하면서 희망을 보는 듯이 엉킨 목소리와 감정과 표정의 뮈체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물 속에 어느새 나의 눈물이 섞였다. 가슴 부근에서 잔잔히 흐르던 물결이 어느새 거대한 파도의 흐름을 만들어 냈고, 그 파도는 순식간에 눈꺼풀에 도달해 그 얕은 높이를 가벼이 범람했다. 그렇게 지독히 조용한 격동 속에서 위인전 속 위인처럼 다소 환상적이며 신화적인 영역에 유영하던 '재능'이란 단어가 본모습으로 홀홀하게 발가벗고 내 앞으로 마주 와서 말했다.


  난 그런 게 아냐. 나는 그저 너의 가벼운 변명, 그리고 무거운 너의 겁.


  솔직하게 눈을 마주한다. 그래서, 얼마큼 했는데, 얼마나 쏟아부었는데. 마음과 머리와 몸이 같은 속도로 가고 있는지, 나만의 유일한 속도를 다른 누군가의 속도와 비교하고 스스로 비참할 정도의 헐값으로 취급하고 있진 않은지. 

  달랑 재능 탓을 하기엔 당신의 바다는 광활하고 찬란하고 무한하니까. 그깟 재능이란 것이 없다며 누군가의 바다와 그 바닷속을 자유로이 헤엄치는 누군가를 바라만 보기에, 그렇게 가만히 좌절하며 동경하는 그런 '보통'의 누군가가 되기엔 당신의 재능은 무한하니까. 누군가에게 제니일 수도 있는 당신이 또 다른 누군가를 보고 제니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바다를 허상의 존재로 단언하며 멍청히 손을 놓고 있기엔 우리 모두 '뮈체'이자 '제니'임이 선명하기에.


  나의 이 비겁하고 지질한 단상조차 어쩌면 그저 가벼운 변명일지라도,

작가의 이전글 [상반기 관극 결산] 바라만 보기엔 아까우니까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