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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열 Mar 30. 2024

0. 리스본행 야간비행

포르투갈 겨울 여행

뱉은 말이 부메랑처럼 돌아 등을 떠밀 때가 있다. 연말에 연차 몰아서 쓰려고요,라는 선언에 가까운 계획에 자연스럽게 어디 가냐는 질문이 돌아왔다. 봄에는 먼 해외라는 막연한 대답이 여름에는 호주 포르투갈 스위스 중 한 곳, 가을에는 포르투갈로 좁혀졌다. 생각을 소리로 옮긴 것만으로 포르투갈에 가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


토요일 00:55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해 스히폴 공항을 거쳐 같은 날 06:50 리스본 국제공항에 도착하는 항공편이었다. 처음 만나는 제2여객터미널은 아주 쾌적했다. 밤의 공항에서 느껴지는 한적함이 있다. 붐비는 것을 고려한 모든 환경 속에서 사람만 쏙 빼놓은 것 같은, 밤의 오피스 거리 산책 같은 묘한 해방감이다.


공간을 고루 비추는 조명은 그림자를 제거한다. 그림자가 제거된 공간은 시간 감각에서 떨어져 나와 편의점이나 공장처럼 24시간 변하지 않고 기능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반대로 2 터미널의 천창 아래 트러스, 그 아래 있는 루버는 주변부와 중앙부의 각도가 달라 낮에는 자연광을 조절하고 밤에는 조명에 의해 명암을 형성한다. 전체를 어둡게 밝히는 다운라이트가 쌍을 이뤄 천장의 주변부와 아치를 따라 있었고, 체크인 카운터의 간판과 가로등이 부분적으로 공간을 밝히는 작은 도시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사람이 없는 밤의 터미널은 밤이나 휴일의 오피스 거리, 혹은 폐점 시간이 다가와 정리 중인 쇼핑몰 같았다.



플라스틱 마감의 좌석에 앉아 이비인후과에서 ‘아 해보세요’ 할 때 쓸 것 같은 나무 식기로 점점 부실해지는 것 같은 기내식을 먹었다. 환경에도 회사 재정에도 좋은 건 알겠지만 여행의 들뜸을 조금 가라앉히는 건 어쩔 수 없다. KLM은 여전히 베개와 담요, 그리고 줄 이어폰을 준다. 없는 것보단 낫지만 줄 이어폰과 나무 식기가 환경에 미칠 영향을 더하고 빼다가 잠이 들었다.



스히폴 공항에서 비행기는 일반 차량이 지나다니는 지하차도 위로 난 유도로(taxiway)로 지나간다. 승객이 어디로 내리고, 어디에서 보안 검색을 하고, 어느 구간을 묶어 면세점을 만들고, 일 하는 사람들은 어떤 통로를 쓰고. 승객과 근무자, 사람과 비행기와 자동차를 잘 나누고 잇는 일이 결국 이 시대의 건축가가 해야 하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탑승구 창 밖이 점점 빨갛게 밝아왔다. 탑승을 기다리는 승객이 하늘을 보며 감상에 젖을 수 있게 하는 것도 건축가가 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스히폴 공항은 굉장히 날 것 같으면서도 알아보기 쉽다. 벽도 천장도 색과 모양이 구간에 따라 제각각이다. 빨갛고 파란 페인트였다가, 은색 알루미늄 루버였다가, 목재였다가, 하얀 빤딱이는 플라스틱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어딜 가나 같은 주황색으로 빛나는 안내판의 크기는 그 내용물과 관계없이 일정하다. T2, C18처럼 현 위치를 보여주는 글자는 크게 안내판에 꽉 차 있다. 한편 가야 할 곳을 표시하는 글자는 빈 공간도 아랑곳하지 않고 작은 크기로 순서대로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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