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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열 Mar 30. 2024

1. 씻지는 못했지만 리스본

포르투갈 겨울 여행, 리스본 1


내륙을 통과할 거라는 예상과 다르게 네덜란드를 벗어난 비행기는 좀 지나 바다 위를 날았다. 창 밖으로 스페인일지 포르투갈일지 모르는 해안이 나타났다. 지구의 표면에 곧은 선을 그어 여기서부터는 바다라는 듯이 나뉜 해안에 파도가 평행하게 그어졌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본 파도는 거의 움직이지 않아 지구의 껍질을 깎다 남은 자국처럼 보였다.


겨울에는 리스본에도 포르투에도 한 달 중 열흘이 넘게 적지 않은 비가 온다. 세로로 긴 나라임에도 위도의 차이보다는 대서양의 존재가 더 큰 영향을 미치는 듯했다. 운 좋게도 여행 기간 중 딱 하루를 제외하고는 비를 만난 적이 없었다. 최고기온 15도, 최저기온 6도의 날씨가 보름 가량 이어졌다.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한파를 겪고 있던 한국 친구들에게 거기 기온에 절댓값 하면 여기 정도 된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


공항에서 알파마에 있는 숙소까지 우버를 타고 26분에 11유로를 결제했다. 말레이시아 출신의 우버 기사는 유럽 시민권을 얻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포르투갈을 통해 입국한다고 했다. 심사가 덜 까다로운 포르투갈에서 5년간 일을 해서 시민권을 얻고 나면 솅겐 조약에 가입한 다른 국가에 가서 살 수 있다. 그렇지만 포르투갈에서의 현재 수입이 아쉽다고도 했다. 차창 밖으로 칠이 해진 집과 그라피티, 방치된 쓰레기통이 지나갔다.


체크인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다고 연락을 하니 비앤비 주인은 흔쾌히 숙소 문을 열어줬다. 간단한 기내식 샌드위치의 배고픔과 40시간쯤 편히 눕지 못한 피곤함이 나갈지 말지 줄다리기를 했다. 샤워를 하고 싶었지만 청소팀이 아직 도착하지 않아서 수건이 없었다. 샤워를 했다면 그대로 침대에 들어가 잤을지도 모른다. 짐을 열고, 날씨에 맞춰 옷을 갈아입고 간단하게 세수를 한 뒤 배고픔의 손을 들어주러 나왔다.



타임아웃 마켓 리스본은 가이드 북을 출판하는 영국의 타임아웃에서 기존의 시장을 개조해서 만든 일종의 푸드코트다. 시장은 창고 같은 박공 형태의 대공간 두 개가 옆으로 붙어있는 것처럼 생겼다. 한쪽은 아직 시장의 기능이 남아 있고 다른 한쪽에 식당가가 있다. 식당가 공간의 중심에는 테이블이 길게 늘어서 있고 이 공간을 작은 식당이 둘러싸고 있다. 진동벨이 울리면 주문한 식당으로 가서 가져오는 방식은 익숙했지만 그릇을 가져다줄 필요는 없었다. 테이블에 두고 자리를 뜨면 관리자가 테이블 사이를 돌아다니며 식사가 끝난 식기를 정리한다. 그릇과 식기, 쟁반 등의 식기를 공유해서 이런 운영이 가능했을 것이다. 다만 오후여서인지 시장을 이용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내 시야 밖에서 살아있는 기능으로 공존하는 곳이기를 바랐다.


타임아웃 마켓에서 크림소스와 대구가 들어간 요리를 먹었다. 걱정보다 짜지는 않았는데 아마 염장 대구가 아니라 생 대구라서 짜지는 않았다. 대구 요리에 곁들여 나온 고구마 칩이 묽은 크림소스를 머금어 감탄스러운 단짠을 만들었다. 오후 3시에 가까운 시각인데도 자리를 잡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이 많았다. '맛있는 로컬'에 집중한 식당 구성과 공간적인 경험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고 생각한다. 좋은 공간을 조성하고 유명 식당을 입점하려는 시도는 요즘의 몰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노력이다.



여행지에서 간혹 지평의 경계선까지 뚜렷하게 파란 하늘을 볼 때가 있다. 채도와 균일도가 높아 크로마 키 같은 낯선 하늘을 보면 여행지에 온 것 같다고 실감한다. 오후 두 시의 태양 아래서 색색의 타일과 칠로 덮인 건물들은 그림자를 잃어버리고 평평하게 눌려 있었다. 발길 닿는 대로 걸은 길에서 대지진 이후 폼발 후작의 지휘 하에 재건된 바이샤(Baixa)와 시아두(Chiado)의 가게들, 노상 서점들, 군악대의 음악과 음악에 맞춰 춤추는 사람들, 크리스마스 공연과 노란 트램, 젤라또, 투나(tuna)의 노래, 계단과 엘리베이터, 빨랫줄에 걸린 빨래들과 성당을 만났다.


리스본의 첫 저녁을 맞이하러 알파마를 한참 걸어 올라갔다. 흰 석재는 점점 노랗게 물들고 타일 벽은 노란 햇빛과 하늘과 테주(tejo) 강의 파란빛으로 반짝였다. 땅과 건물은 스스로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그림자에 미처 삼켜지지 않아 아직 붉은 첨탑의 뒤로 분홍색 하늘이 보인다. 바다 같아 보이는 테주 강의 아래서부터 지구의 그림자가 노을에 번지면서 붉은 기운을 보라색으로, 다시 파란색으로 밀어냈다.



핑구 도스(pingo doce)에 가서 마트 구경을 하고, 물과 와인을 사고, 가는 길에 봐뒀던 와인 바에서 세비체와 구운 생선을 먹었다. 구운 생선에는 상큼한 소스와 감자가 곁들여 나왔는데, 역시 생선 기름과 신 맛은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결국 리스본에 머물던 중 두 번을 더 갔다. 성공 여부는 둘째 치고라도 검색하지 않고 들어간 가게는 기억이 오래 남는다. 그 가게를 고르기 위해 자세히 살펴본 기억이 이야기가 되어 경험에 한 겹 더 씌워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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