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츄부 中部 겨울 여행
일본 츄부 中部 겨울 여행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설국이었다.
밤의 아래쪽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겨울이면 북쪽에서 습기를 머금은 찬 공기가 내려와 일본 중부의 높은 산맥에 부딪쳐 큰 눈을 내린다. 가와바타 야스노리의 소설 <설국雪国>은 일본 중부지방의 니가타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하얀 붓으로 찍어놓은 것 같은 뾰족한 산과 마찬가지로 무겁게 쌓인 눈에 어깨가 내려간 침엽수, 그리고 하얀 눈의 그림자인 것처럼 짙게 그을린 목조 건물. 마침 겨울이니만큼 그 풍경이 보고 싶었다.
동으로는 도쿄가 있는 간토, 서로는 오사카와 교토가 있는 간사이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츄부中部는 덜 알려진 만큼이나 부르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주부'가 옳은 표현이지만 개인적으로 와 닿는 표기법은 '츄부'다.
“중부지방 여행”이라고는 하나 막연한 얘기다. 여행기간은 5일, 중부지방은 9개 현을 포함한 넓은 지역이니 하루에 한 개 현을 가도 한참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렇게 훌훌 훑고 싶지는 않으니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언젠가 눈이 올 때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가나자와와 시라카와고를 목적지에 넣고 교통수단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도 딱히 가능할 것 같진 않지만 해외의 눈 내린 도로를 가서 무사히 여행을 마칠 만큼 운전이 능숙하지 못하니, 렌트를 하지 않는 이상 선택지는 버스와 열차뿐이다.
여행지에서의 교통수단은 열차를 선호하는 편이다. 이동하면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점,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역으로 이동해서 초행길에 찾아가기 수월하다는 실용적인 이유 외에도 열차여행은 기분이 좋다.
역이나 공항에 찾아가면 ‘여행’이라는 말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직 이동을 위해 만든 거대한 구조물 속에서 사람들은 열차와 사람을 기다리고, 거대한 전광판은 그 시간을 알려주고, 비행기나 열차 같은 거대한 이동수단은 끊임없이 왔다가 다시 떠난다. 이동을 위한 거대한 시스템 안에서 사람들은 전광판을 보고, 걷고,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들뜬 얼굴로 동반자와 이야기를 한다. 오로지 이동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은 담고자 하는 행위가 좁은 만큼 사람의 감정이 부각되는 걸지도 모른다. <러브 액츄얼리Love Actually>의 처음과 끝, 게이트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과 나오는 사람들을 보는 것처럼.
주위보다 철로가 높은 데다 차체 자체의 높이도 있어 주변 풍경이 잘 보인다는 점도 좋고(이런 점에서 소음과 속도 문제로 주위가 막혀있는 고속철도는 기차 여행의 재미가 반감된다), 주기적으로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전력공급선을 멍하니 지켜보는 재미도 있다. 마침 JR에서 나온 다카야마-호쿠리쿠 지방 투어리스트 패스가 있다. 5일에 14000엔, 저렴하지는 않지만 가려고 했던 곳을 모두 포함하고 여행 기간도 적당하다. 어차피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이 패스로 갈 수 있는 곳 안에서 목적지를 고르고 방문할 날짜를 조정하는 걸로 기본적인 여행 계획은 끝이다.
전날 잔뜩 온 눈에 11시 10분발 항공기는 13시 10분으로, 다시 14시 40분으로 연발됐고, 승객을 태우고도 날개에 얼어붙은 눈을 떼어내기 위해 한참을 기다리다 간신히 출발했다. 오후 느즈막에서야 겨우 도착했으니 오후에 다카야마를 둘러보겠다는 계획은 이미 물거품이 됐고, 츄부국제공항에서 나고야역으로 가서 저녁을 해치우기로 했다. 다카야마행 마지막 열차 시간을 확인하고 역에 있는 음식점을 둘러봤다. 기왕 나고야에서 먹게 된 만큼 히쓰마부시도 고민했지만 기름지고 든든한 식사를 할 기분은 아니었다. 역시 국수를 먹자. 평범한 경양식이겠거니 생각하고 간단하게 먹을 생각으로 들어간 가게는 의외로 독특한 맛이 있었다. 건면 파스타와 우동 사이의 두께를 가진 면에, 토마토라기보다는 소금과 후추로 간을 한 것 같은 소스는 아주 ‘맛있다’는 아니지만 따로 살까 5분 정도 고민할 정도로 신선했다.
저녁을 먹고 나고야역의 마지막 다카야마행 열차를 타고 느지막이 이동했다. 나고야에서 기후까지는 도카이도 본선을, 기후부터는 다카야마 본선을 타기 때문에 차내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기후 역으로 들어온 방향으로 다시 나가는 점이 재밌다. 열차는 11시가 다 되어서야 다카야마에 도착했다. 기후 역부터 흩날리던 눈발은 골짜기를 따라 구불구불 놓여 있는 선로를 가니 점점 쌓여가 다카야마에 도착할 즈음에는 완연한 설국이었다. 밤의 아래쪽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숙소는 까만 목재가 반질반질하게 빛나는 오래된 목조 여관이었다. 입구에서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고, 모서리가 둥글둥글해진 계단을 올라 작게 삐걱대는 2층 복도의 가장 끝 방에 묵었다. 복도 폭은 90cm 정도로 두 사람이 양쪽에서 마주 지나가기엔 조금 좁고, 잠금 장치가 있기는 해도 방의 미닫이문은 인심 좋게 복도의 소리를 방 안까지 들였다. 양쪽에서 캐리어를 끌고 지나가도 여유로운 폭에 닫으면 고요해지는 문이 좌우로 규칙적으로 나있는 호텔 복도와는 사뭇 다르다. 목재 창은 찬 공기가 약간 스며드는 듯했고, 문을 나서서 마찬가지로 모서리가 둥글둥글하고 작게 삐걱이는 바로 앞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공용으로 사용하는 화장실과 욕실이 있었다. 그래도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불편함이었다.
숙소 아래에 깔린 생각은 숙소의 모든 부분을 결정하는 데 하나의 지표가 되고, 결정된 부분들로부터 받는 감각이 모여 숙소의 개성을 만든다. 공용 화장실과 욕실이 있는 숙소라 하더라도 게스트하우스, 유스호스텔, 오래된 여관의 느낌은 다르다. 똑같은 공용 화장실을 사용하는 별 두 개짜리 숙소여도 그 이유는 비용을 절약해 저렴한 가격에 숙박을 제공할 수도, 다른 용도의 건물을 개조하다 보니 설비가 여의치 않을 수도, 원래 사용하던 방식을 고수하는 방법일 수도 있다. 같은 비용, 같은 면적에서도 화장실을 공용으로 할당하는 대신 멋진 공용 공간을 제공하는 숙소가 있는가 하면 공용 공간 대신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개별 방에 화장실을 배치하는 숙소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숙소 배경에 깔린 생각, 철학은 운영 방식과 공간 구성부터 가구나 침구류, 인테리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다.
사실 씻기 위해 방을 나선다는 건 그리 달가운 조건은 아니다. 그럼에도 몇십 년간 스쳐 지나간 슬리퍼 바닥에 닳아 번들거리는 어두컴컴한 나무 복도, 촌스러운 색깔이지만 깨끗하게 관리된 욕실의 타일은 "옛 상태 그대로의 숙소"라는 생각에 근거가 되어 불편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경험하는 감각들이 모여 개성이라는 설득력을 가졌을 때, 사용자는 그 개성을 만들기 위해 선택된 불편에 공감하고 선택할 수 있다. 편의시설이나 멋진 공간은 없어도 쾌적하고 편리한 숙박을 선택할 수도, 복도의 소리와 바깥공기가 스미는 방이지만 씻기 위해 방문을 열고 기꺼이 슬리퍼를 신을 수도 있다. 그렇게 다양성이 생겨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