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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열 Feb 05. 2021

2. 다카야마-지방 도시에 산다는 것

일본 츄부 中部 겨울 여행 - 다카야마

일본 츄부 中部 겨울 여행

다다미방에서 눈을 뜨고, 세면용품을 챙겨 문을 나서 슬리퍼를 신고, 삐걱이는 계단을 걸어 내려가 공용 세면대에서 세수를 한다. 방에서 나올 때 느껴지는 살짝 쌀쌀한 공기가 새롭다. 단열과 난방 설비가 부족한 오래된 집에서 묵으면서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불편함이지만, 만약 화장실이 건물 밖에 있어 밖으로 나가 차가운 외기와 마주해야 한다면... 잘 모르겠다.



여행은 항상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다음 날 단체손님이 있는 바람에 숙소에 짐을 맡기지 못하고 역의 코인로커 신세를 져야 했다. 노히 버스로 다카야마에서 시라카와고를 경유해 가나자와로 이동할 계획이었지만, 버스는 전석 예약제로 시라카와고에서 가나자와로 가는 버스 편은 마감이었다. 할 수 없이 시라카와고는 다카야마에서 왕복하고, 다카야마 역에서 열차를 타고 가나자와로 가야 했다. 시간은 좀 더 걸리겠지만 코인로커에서 짐을 도로 뺄 필요는 없어져서 그나마 위안이 된다.


숙소 체크아웃을 하고, 역에 들러 짐을 코인로커에 넣고, 12시쯤 시라카와고로 떠나는 버스를 예약하고, 아침거리를 찾을 겸 걷다가 마침 적당한 빵집을 발견하고 효모 빵과 애플 파이, 우유를 샀다. 가게 안에서 작은 선반같은 곳에 기대어 먹으며 가게 앞을 내다봤다. 집마다 무거운 눈이불을 머리에 이고 있었다. 어두운 밤에는 실감하지 못했던 강설량이 와닿았다.


애플파이는 적당한 당도에 물컹거리지도 사각거리지도 않는 식감이 참 만족스러웠고, 로고와 색만 바꾸면 서울우유 같아 보이는 ‘히다우유’도 진하게 고소하면서도 끝이 깔끔하게 떨어졌다. 홋카이도에서도 참 우유가 맛있다고 느꼈는데 오비히로가 제빵제과로 유명하다. 우유가 맛있으면 제빵의 질이 올라간다는데,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계획대로라면 12시에 노히 버스를 타고 가 시라카와고를 보고 다시 다카야마로 돌아와서 5시 16분 도야마 급행을 타고 가나자와로 간다. 거의 식사 시간에 이동을 하니 틈틈이 군것질로 식사를 대신하기로 했다. 빵을 먹고 다카야마에서 양조장을 구경하고, 근처 관광지 앞에 있는 문구점 같은 곳에서 고헤이모찌(五平餅)와 미타라시당고(みたらし団子)를 사 먹었다. 고헤이모찌는 길쭉하고 둥글둥글한 떡을 아이스크림 막대기에 끼워서 된장같은 걸 발라서 굽고, 미타라시당고는 경단을 산적꼬치에 꽂아 간장 소스에 빠뜨렸다가 굽는다. 그 자리에서 구워주니 나오는 데 대략 5분 정도 걸린다. 이 지역 사람들에게는 호떡이나 떡볶이 같은 느낌의 음식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길에서 바로 내주는 길거리 음식은 힘이 있다. 튀김이나 호떡을 품은 기름의 자글자글 소리, 철판에 재료의 표면에서 수분이 증발하며 나는 소리는 후각과 청각을 자극하고, 요리하는 모습과 그걸 먹기 위해 서있는 사람들은 시각적으로도 굉장한 풍경이다. 포장마차, 야타이, 푸드 트럭같이 국적을 불문하고 길거리 음식은 그 수만큼 모양도, 양상도 제각각이다. 한 가게와 그 옆 가게는 파는 음식도 모인 사람도 다르고, 그 모습도 시간에 따라 다르다. 길이라는 공공 영역을 점유하는 사적인 주체가 경제활동을 매개로 그 개성만큼 다양하게 길을 꾸미는 셈이다. ‘다양성’은 근본적으로 한 주체가 단독으로 만들어내기 힘든 가치다. 관리하는 주체가 있다면,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이 사적인 주체가 과도하게 증식해 통행을 막는 등 도로의 공적인 기능을 크게 저해하지 않도록 조정하는 것 뿐이다.



지방 도시에 사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이, 모여 사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를 갖고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살고, 건물을 세워 소아과를 운영하고,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기까지의 생각의 흐름이 큰 도시에 사는 사람이 갖게 되는 흐름과는 크게 다를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한다.


어머니로부터 내가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동네에 계시던 소아과 의사 선생님은 아이가 아프다고 찾아가면 꼼꼼하게 진료를 해줬다고 한다. 해결하기 어려운 증상이면 큰 병원으로 바로 보내고 ,아프면 낮이든 밤이든 연락달라는 말에 종종 크게 아프곤 하는 어린 아이를 처음 키워보는 초보 부모에게는 큰 지지가 되었을 것이다.


지방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은색 타일로 반짝이는 소아과를 나 또는 내 아이의 어릴 적의 기억으로 각인하는 일, 어쩌면 아이와 내가 같은 기억의 대상을 공유하는 일, 그리고 누군가의 아이에게 각인될 소아과를 세우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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