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살 노견 뭉치를 키우고 있다. 뭉치는 백내장과 녹내장으로 두 눈이 멀었고, 슬개골 탈구가 심해 카펫과 같이 미끄럽지 않은 천이 깔린 바닥에서만 걸음을 뗄 수 있는 아이다.
평생을 가족들과 함께 살던 뭉치가 몇 년 전 독립해 본가에 발길을 끊다시피 한 나에게 온 이유는 다름 아닌 건강 때문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게 된 이후로 뭉치는 4베이 구조의 본가를 버거워했다. 안방에 가서 엄마를 확인하고, 거실에 가서 아빠를 확인하고, 서재에 가서 오빠를 확인하고, 작은 방에 가서 언니를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인데, 몸이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아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 자주 토를 했고 힘없이 늘어져 있는 나날이 늘어만 갔다.
그러다 슬개골 탈구 때문에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적이 있었다. 배변 패드까지 가지 못하고 벌벌 떨다 제자리에 주저앉아 소변을 보던 모습에 가족 모두 충격을 받았다. 백방으로 수소문하다가 침을 맞고 나아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방동물병원에 데려가 여러 차례 침을 맞히고 한약도 먹였다. 지극한 정성 덕분인지 아니면 정말로 침이 효과를 보인 건지 알 순 없지만, 뭉치는 차차 호전되어 다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아프지 않게 보내주기 위해 안락사를 시켜야 할지 말지 고민하던 차에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카펫을 깔지 못한 강마루 바닥에서 넘어지며 힘겨워하는 뭉치가 안쓰러워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독립한 집에 데려왔다. 처음에는 가족들과 떨어져 조금 우울해하는 기색도 보였으나 활동 범위가 줄어들어서인지 스트레스를 덜 받았다. 상대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는 1.5룸의 작은 집이 뭉치에게 딱 알맞았다. 속에서 올라오는 역한 구토 냄새가 사라졌으며, 안압으로 인해 눈에 끼던 고름도 줄어들었다.
그렇게 반년이 흐르고 둘만의 생활에 익숙해져 갈 무렵, 15평 아파트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나야 작업실과 침실을 드디어 분리하게 돼 기뻤지만, 노견인 뭉치가 전보다 넓어진 집에 적응할 수 있을지 심히 걱정되었다. 또다시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사 오자마자 바닥에 매트와 카펫을 깔았다. 반려견을 위한 타일 카펫이라는 게 출시돼 바닥 모양대로 시공하면 된다고 해서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적응부터 시키기로 했다. 배변 실수를 얼마나 하는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다닐 수 있는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무턱대고 살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카펫들도 많았고.
이사 당일에는 이삿짐센터 사람들과 각종 가전제품 설치 기사들이 집을 방문해 혼란스러울까 봐 본가에 맡기고 다음다음 날 새집에 데려왔다. 이미 말을 알아듣고 배변 훈련이 되어있는 아이였지만 나는 처음부터 다시 길들이겠다는 각오로 오로지 뭉치에게만 집중했다.
밥을 다 먹으면 잘했다고 칭찬을 하고, 스스로 방석을 찾아가도 칭찬을 하고, 장난감 공을 가지고 놀아도 칭찬을 하고, 노즈워크로 간식을 찾아도 칭찬을 하고, 배변 패드를 깔아둔 곳에 배변하면 몇 배로 칭찬해 주었다. 더 자주 말을 걸고 더 자주 호들갑을 떨며 상대를 해주었다. 아직 애를 길러본 적은 없지만 마치 신생아를 키우는 느낌이었달까?
엄청난 칭찬 공세에 뭉치는 전보다 더 활발해졌다. 심지어 아픈 뒷다리로 펄쩍펄쩍 점프까지 하면서 기쁨을 표현했다. 영특하게도 집에 온 지 반나절 만에 배변 위치를 기억해 실수도 거의 하지 않았다. 장판이 미끄러울 법도 한데 카펫을 깔아놓지 않은 곳도 탐험하며 새로운 곳에 적응하려 애썼다. 거실과 침실, 드레스룸을 마음껏 활보하며 자신의 새로운 왕국을 파악해 나갔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고, 갑작스럽게 바쁜 일이 생겨 뭉치를 일 순위에 둘 수 없게 되었다. 평소보다 많은 양의 간식을 숨겨두고 노즈워크 놀이를 하게 했는데, 뭉치가 간식을 찾다 말고 통화 중인 나에게 다가와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뭉치는 무언가 원하는 것이 생기면 앞발로 툭툭 치고 낑낑거리는 소리를 내며 본인의 의사를 표현했기에 서둘러 전화를 끊고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파악하려 했다.
말린 고구마 간식이 사방에 그대로 있었고 장난감 공도 침대 밑에 들어가 있지 않았다. 물그릇을 확인했으나 식수가 충분히 있어 의아해하던 찰나, 뭉치가 배변 패드 앞으로 당당히 향했다. 그곳에는 실수 없이 본 소변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었다.
어서 빨리 칭찬해 달라는 듯한 뭉치의 얼굴을 보며 깨달았다. 칭찬이라는 형식의 관심과 사랑이 뭉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을. 지속적인 동기 부여의 효과를 주고 진취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호르몬인 도파민이 분비된 게 틀림없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던 뒷다리를 자극해 힘을 내보낸 건, 다름 아닌 칭찬을 받아 생긴 기쁨의 감정이었다.
부모님은 칭찬에 인색한 분들이셨다. 무언가를 해내면 잘했다는 칭찬보다는 자만하지 말라는 조언을 하셨다. 지금은 나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서투른 감정 표현 때문에 칭찬해 주지 못했음을 깨닫게 되었지만, 지구 아니, 온 우주가 불만이었던 사춘기 시절의 나는 그런 부모님이 이해되지 않았다. 혹여 칭찬 대신 꾸지람을 들을까 입을 꾹 닫게 되었고 나 또한 남들에게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살았다.
가족보다 친구를 더 좋아했고, 집보다는 밖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던 나에게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왔다. 누군가가 내 창작물을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훔쳐 갔는데 위로가 될 거라 믿었던 친구들이 멋지게 내 뒤통수를 쳐 주었다. 결국, 나는 심적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모든 걸 내버린 채 태국에 가서 쉬다 왔다. 그럼에도 사라지지 않는 괴로움을 견디기 위해 도피성 여행을 마무리하고 어머니가 계신 시골집에 찾아갔다. 당시 항암 치료를 하던 어머니는 본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골에 집을 얻어 요양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해마다 가는 방콕에 돈 아깝게 왜 또 갔냐는 잔소리 대신 '잘 갔다 왔어.', '잘했어.', '고생 많았어.', '다음엔 엄마랑 같이 가자.'와 같은 말을 해주었다. 여행으로도 풀리지 않던 응어리 진 감정이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지속해서 칭찬을 듣고 자란 사람만이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지닐 수 있다고 믿어 왔다. 그런데 칭찬은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의, 시니컬 그 자체인 사람마저도 변화시켰다.
아예 본격적으로 짐을 싸고 내려와 몇 달을 어머니와 함께 시골에서 생활했다. 얼굴만 마주치면 짜증을 부리던 나는 어머니의 자연 친화적인 요리를 매일같이 칭찬했고 어머니는 너라면 더 좋은 창작물을 탄생시킬 수 있다고 칭찬해 주었다. 마음이 점차 편안해지고 상처가 아물어 갔다.
돌이켜 보면 그때가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웠던 순간이었다. 당시에 집필한 소설은 내가 쓴 글 가운데 가장 따뜻하고 유쾌한 글이 되었다.
지금은 시골집을 정리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일상을 살고 있지만, 전보다 더 자주 연락하고 더 자주 얼굴을 보며 지내고 있다. 칭찬의 힘이 모녀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칭찬은 사람으로 치면 일흔 살인 강아지에게 움직일 힘을 부여해주고, 절망에 빠져 아무것도 믿지 못하게 된 사람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돈 한 푼 들지 않는 일인데 꽁꽁 싸매고 아낄 필요 없지 않나. 그러니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에게도 칭찬해주자. 참 잘했어, 잘 견디고 있어,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