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고딩의 중간고사 1일 차. 일반적인 집이라면 온 가족이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제각기 강한 개성을 지닌 우리 가족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시험은 시험이라고, 귀가한 고딩에게 시험은 잘 보았느냐는 질문은 빼놓지 않은 나~ 시험지를 잘 확인했는지 여부를 살피는 것 역시 입시지옥을 동행하고 있는 엄마의 올바른 자세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말해 뭘 해~ 망쳤지~"라고 말하는 그녀의 입가에 스쳐가던 미소를 놓친 것은 정말이지 실수였다. 슬쩍 점수를 알려줬지만 나의 뇌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사실 내 머릿속에는 그녀의 기존 성적에 대한 데이터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데이터 저장용량은 1기가도 안 되는 것을 어찌하랴. 이 머리로 공부하는 것이 기적인 것을...
그러나 변명하자면 그 순간, 나는 점수보다 그녀의 실수담에 더 집중하고 있었다. 5점짜리 주관식을 다 풀어놓고 답을 잘못 썼다는 말에, 센스 꽝인 엄마는 그저 혀를 찰 뿐이었다. 시험지를 잘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실력이라는 일장연설을 시작하려는 찰나, 그녀의 얼굴에는 분노의 '빠직'이 드러났다. 다행히도 항상 고장 나 있던 눈치 센서가 운 좋게 작동하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도망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마터면 집안 분위기를 살얼음판으로 만들 뻔했다.
그런데 이 고딩, 뭔가 아쉬움이 남은 표정이었다. 뭔가 할 말이 더 있는 듯했지만, 나는 이미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말 한마디만 더 실수하면 그녀의 수도꼭지가 틀어질 조짐이 보였으니 말이다. 이럴 땐 일단 삼십육계 줄행랑이 답이지~
그렇게 내 컴퓨터 앞으로 돌아와 두 시간 정도 일을 했을 때, 불현듯 성적의 숫자 앞자리가 바뀌었다는 것이 떠올랐다. 지난 1학기 기말고사 성적을 뒤져 보니~ 오, 10자리 이상 성적 상승!!!
기적이다~!!!
고딩의 방문 앞에서 미적거리다 슬그머니 방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밀었더니, 날카롭게 쳐다본다.
"성적 많이 올랐더라."
"치, 그걸 이제 알았어? 바보야?"
말은 퉁명스러워도 입가엔 미소가 스친다. 이거다. 칭찬을 받고 싶었구나. 옆에 가서 잘했다고 궁둥이 팡팡 해주는데 반응이 호의적이다. 평소 같으면 귀찮다고 짜증부터 낼 텐데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인다. 칭찬과 함께 막춤 세리머니 한 번 해주고 돌아 나왔다.
그녀도 역시 지극히 평범한 고딩이었던 것이다. 눈치 꽝인 엄마만이 늘 한 템포 느리게 알아챌 뿐이다. 항상 성적에 연연하지 않는 엄마인 척 연기하느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쳐버렸으니... 역시 좋은 엄마 되는 길은 멀고 험하다.
위로와 격려의 타이밍만큼 칭찬의 타이밍도 중요하다. 오늘은 막춤으로 놓쳐버린 타이밍을 만회했지만, 항상 이렇게 운이 좋을 순 없으리라. 세상 그 어떤 공부보다 어려운 것이, 바로 이 고딩의 마음을 알아채는 일인 것 같다.
그러나 나는, 1기가도 안 되는 머리의 한계를 우직한 엉덩이의 힘으로 극복하며 공부해온 의지의 한국인이다. 우리 집 고딩을 이해하고 아는 것은 세상 그 어떤 공부보다 어렵지만, 그 어떤 지식보다 큰 깨달음과 기쁨을 준다. 그러니 더욱 분발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아이의 성장과 함께, 엄마인 나도 점점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엄마가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아닐까? 여전히 좌충우돌 부족함이 많은 엄마지만, 그녀와 함께이기에 두렵지 않다. 우리는 같이 커(?) 가는 모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