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양, 화순 세량지
근래 본 가장 운치 있는 가을이 그곳에 있었다.
한 모퉁이도 무심히 지나치지 않도록 작정하고 설계한 듯 곳곳이 시선을 잡던 선비의 정원.
그렇다고 인위적이지도 않아 유교 사림(士林)의 은거지다운 정체성을 안은 채 지구촌 어느 정원에
견주어도 안 빠질 묘한 세련미까지 지녔다.
이즈음이 만추의 정취로 가득해 더 감탄스러웠던 것인 지는 모르지만 아마 다른 계절에는 또 다른
미학적 풍경이 펼쳐질 거라 여겨진다.
남도로 내려가며 잠깐씩 들렀던 담양은 대나무밭이 무성한 죽녹원을 들른 기억은 있는데
교토 아라시야마의 대숲을 닮은 그저 그런 인위적 풍경이라 여겼다. 그래서 이번 여행길엔
근처 국수거리에서 맛있는 국수나 잘 먹겠다 했는데 소장하고 싶은 진품 명소를 하나 얻은 기분이다.
소쇄원은 사림의 거두였던 스승 조광조의 몰락과 사사(賜死)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한 선비가
만들어 기거한 민간 정원이라는데 이렇게 멋진 사계의 자연을 품고 살았다면 그깟 벼슬이
대수일까 싶네 .( 그러나 이건 나의 생각일 뿐..)
훗날 소쇄원은 호남 문학의 산실이 되어 사림의 선비들을 부르고 송강 정철 같은 조선 최고의
문신들을 키워냈다. 그래서 도로 이름도 가사문학로 ?
나는 눈 감고도 정철의 장편 가사 작품들을 줄줄 읊어대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의 안빈낙도를 이룬
서원이었다니 더욱 의미 깊고...
굵게 뻗은 푸른 대숲을 바탕색으로 삼고 다양한 종류의 수목들을 곳곳에 배치하여 오늘 같은 가을날이면
금빛 단풍 무리들이 무더기로 너울질 조경을 주인장은 미리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게다.
우리 민족이 시대를 초월해 예술적 감각이 뛰어난 건 맞는 말 같다.ㅎ
정원을 관통하는 계곡 위 통나무 다리에서 화려하기 그지없는 가을 사진 하나 씩을 남겼다.
대나무로 유명한 담양과 화순을 가면서
아무래도 전라도 음식은 은근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죽순 줄기들이 올려진 매운 비빔
국수를 점심으로 먹고 저녁에는 가짓수 많은
한식 밥상이다. 여자들은 고기보다 나물 같은
채소류를 좋아한다. 그것도 비빔밥으로...
나는 대부분 그냥 먹게 되는데 보리밥과 쌈,
불고기의 조화도 좋다.
급 추워진 날씨 탓에 밤사이 아예 무더운(?) 취침을 하고 아침 산산한 공기 속 산길을 올라
CNN까지 소문났다는 화순 8경 저수지 세량지를 갔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아침녁과 산벚꽃이 투영되는 봄철에 특히 사진작가들의 발길이 붐빈다는데
흐린 날 나의 별로인 휴대폰 사진에도 수면 위의 풍경이 그럴싸 한 걸 보면 인정이 된다.
조금 어둡게 가라앉은 적막한 못은 사람들의 심연을 건드리는 뭔가가 있어 한참 내려다보고 있으면
마크 로스코 작품의 데자뷔 효과가 있다. 개별적 여행이었다면 제법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깊은 가을을 보고 가는 여행으로 차에 오를 때마다 추위를 덜어 주던 전통차 한 잔의 배려는
따뜻한 기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