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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강릉 초당 허난설헌 생가, 모란

by Suyoung



당을 나눈 담장을 돌면 조화롭고 평온한 기운마저 느낄 수 있는 작은 별채들과 낮은 툇마루가

있어 그곳에 앉아 오래된 감나무의 무성함을 보던 가을 정원도 좋고

도시에선 귀한 대접받는 토종 모란과 작약들이 무리진 늦은 봄날에는

동양화 화폭 속을 잠시 들어선 듯 고전적 기분도 된다.

부담스럽지 않은 따뜻한 정감이 곳곳에 서린 이 집의 가족들이 모두 처연한 운명을 맞아야 했는지는 그래서 늘 의문이지만...

어느 해 수능이 끝난 아이들과 졸업여행같은 걸 갔다가 잠시 들른 경포대에서

처음 본 이 집은 겨울 초입 바람 속에 잿빛으로 웅크린, 그녀의 시 '오래된 집'의 구절처럼

거뭇거뭇 이끼만 가득한 고택이었다. 적막한 기류가 예사롭지 않아 다시 보게 되리라 예감은 되었지만...

곁에 붙은 유명 순두부집 명성보다 못한 듯 사람들은 식사를 마친 후 무너진 담장을 밟고 건너 와

툇마루에 커피 한 모금을 나누다 서둘러 떠나곤 했다.

모두들 오죽헌에 들러 율곡의 어머니를 반드시 챙기고 가던 강릉이었다.


조선 시대 여인으로 유일하게 타국에서 인정하여 발간해 준 자기 문집을 가진 누이와

역사를 100년쯤 앞당김하는 멋진 꿈을 꾸다 능지처참까지 간 동생 허 균의 생가...

앞선 가치관을 가진 부친 덕에 문재를 키우고 걸출한 남자 형제들의 비호 속에 자랐지만

몰락해 가는 친정을 지켜보며 자신의 비운의 삶도 담담히 예견하던 난설헌이

그날은 겨울바람 속 마루턱에 작은 명함으로 누워 있었다. 그때의 오랜 시 몇 구절이 다시 찾아야 할

숙제처럼 오래도록 잊히질 않았다.


아이들의 교과서에서는 깊은 문학성과 그녀의 고단했던 일생을 알게 하고 다양한 예술 영역에서도 자신을 존재시킨 드문 중세 여인으로 구현되고 있는 즈음의 난설헌

죽기 전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태우라 했던 그녀는 이런 상황들을 어떻게 여길려나?

이제 귀부인이 된 초상화로 윤기나는 안방에 앉혀진 그녀지만 한적한 뒷채 어디쯤 말없이 피어나던

자색 모란 한 포기의 여운에 그녀를 더 느끼고 올 수 있는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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