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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지 문지기 Dec 15. 2022

독거 아재, 눈물의 오사카 여행

할 게 없네

모든 것이 예상대로 입니다. 저는 혼자 있습니다. 그리고 매일 8km를 달립니다. 5시 30분에 일어나 빨지 못한 운동복을 다시 입고, 텐노지(天王寺) 공원을 네 바퀴 돕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으니 거지처럼 하고 뜁니다. 이곳의 큰 장점 중 하나지요. 대략 세 바퀴 즈음 돌다 보면 저는 제게 취합니다. 해외여행 중에도 자기 관리하는 남자라니,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셀카를 찍어 봅니다. 그리고 바로 지웁니다.


달리고 나면 특별히 할 일이 없습니다. 샤워하며 생각합니다. 남바로 갈까? 아니야 거긴 너무 분주하지, 엑스포 공원? 1시간이나 걸려, 오사카성? 경복궁하고 같을 듯. 어쩔 수 없이 틴더를 실행합니다. 좋군 좋아 이곳에 인연이 있을지 몰라. 신중히 좋아요를 눌러봅니다. 하지만 매칭이 되지 않네요. 20대와 40대까지 확장해보지만 결과는 동일. 에라이, 누가 한국 남자 인기 많다고 했어?

지하철역으로 나옵니다. 사람 많은 커피숍에 들어가 550엔짜리 모닝 세토 메뉴를 주문합니다. 싸구려 커피와 눅눅한 토스트가 첫끼가 됩니다. 대충 먹고 떠날까 하는데 회사원과 학생들이 뛰는 게 보입니다. 시간은 아직 8시. 여기까지 와서 직장인 코스프레할 필요 없지요. 이북을 읽기 시작합니다. 일본이니까 일본 작가의 산문을 펼쳐봅니다. 그런데 웬일, 글은 무겁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 투성입니다. 아 이건 좋지 않습니다. 휴가지에서 우울은 죄가 되는 법이니까요. 노트북을 탁 덮어버리며 일어납니다. 이제 정말 여행하려고요. 하지만 여전히 길은 보이지 않는데.. 저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맛집으로 소문난 곳으로 향합니다. 스시가 유명한 집. 하지만 별 기대는 없습니다. 저는 미식가도 아니고 식탐도 없어서 음식은 중요치 않거든요. 단지 호텔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이라서, 그리고 가보지 않은 지역이라, 움직여봅니다. 지하철 차창에 비친 제 모습이 꼭 게임 속 캐릭터 같아 보입니다. 주어진 미션을 충실히 수행하는 기계라고 할까요. 먹고, 사진 찍고, 인스타 업로드하면 '맛집 미션'이 클리어 될 것 같습니다. 나마비루와 진저 하이보루, 연어와 구운 고기를 시켜 먹습니다. '음 맛있어, 오이시, 쓰고이'라고 정신 승리해보지만, 실은 한국에서 먹던 맛 그대로입니다. 초밥이 그냥 초밥이지, 얼마나 다르겠어요. 다른 사람도 여행의 설렘 때문에 맛있다고 한 게 분명합니다. 얼른 사진을 찍고 나옵니다.


그 뒤로 유명 쇼핑센터에 가고 유적지도 방문했지만 지루함의 연속입니다. 삼일째 아침 저는 여행을 포기하기로 결심합니다. 먼 곳으로 향하지 않고 숙소 근처에서만 시간을 보냅니다. 오전에는 덴시바 공원 옆에 있는 Tully's coffee에 들려 80~90년대 일본 시티팝을 듣습니다. 멜로디가 좋았던 노래(Plastic Love, SHYNESS BOY 등) 가사를 확인하고 뮤직비디오를 봅니다. 고도 성장기에 만들어졌던, 경쾌하지만 쓸쓸한 노래가 저를 좀 더 오래된 일본으로 안내합니다. 약한 술에 취한 듯 몽롱한 시간의 연속. 지금 일본에서는 느낄 수 없는 분위기에 젖으며 저는 속으로 말합니다.


'이이네' (좋네)


배가 고픕니다. 근처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 '이치방, 인기 메뉴'라고 주문합니다. 어차피 별 기대 없으니 일등 메뉴만 먹기로 합니다. 잠시 후 샐러드가 포함된 스테이크가 나왔는데, 맛있습니다. 가격도 저렴하고 일본 아재들의 떠드는 소리도 유쾌합니다. 맛집은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저는 마스타 추천으로 백주를 한잔 마시고 나른하게 뻗었습니다. 그때 라디오에서 보아의 'Merry-Chri'가 나왔습니다. 04년도에 발매된 곡이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자 되살아났습니다. 저는 가사 의미는 몰랐지만, 보아의 목소리가, 청량한 눈이 되어 주변을 밝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평화로웠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보아는 이제 일본 사람의 마음속에 남았구나라고.


술에 취한 채 호텔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보아의 'Merry-Chri'를 틀어놓고 한숨 자려합니다. 깨면 새벽이겠고, 저는 여전히 혼자 있겠죠. 그렇지만 음악 덕분에 제 마음도 조금은 밝아질 것만 같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syRh6K_X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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