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지 문지기 Dec 22. 2022

나는 죽어서 완성된다

마지막에는 피하지 않을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18년째 다니고 있는 회사의 마지막 출근길, 오래된 우리 집이 허물어지는 순간, 그리고 아끼던 사람과 작별할 때. 미래를 단정할 순 없지만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평소처럼 마지막을 맞이할 것 같다. 사라지는 게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별을 준비했을 테니, ‘음... 이제 끝이군’ 되뇌며, 남처럼 상황을 바라볼 것이다.


언젠가부터 나는 ‘거리 두는 법’을 익혔다. 일상을 나눴던 연인이 떠나고, 노력을 기울인 일들이 무의미해지는 경우를 겪으며, 결국 모든 건 사라진다. 남는 건 나 혼자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어차피 혼자라면 마음을 다할 필요 없지, 다만 마지막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게 몇 번이고 그때를 먼저 상상하자, 하나가 끝나면 새로운 하나가 시작되고, 삶은 멈추지 않으니까 주저하지 말자. 이렇게 다짐하며 살기 시작했다.


나는 강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셔도 울지 않고 해야 할 일을 처리하고, 누군가 아파하면 얼른 일어나 이제 다음을 준비해야지라고 말한다. MBTI 같은 성격검사를 하면 흔들리지 않는 정신이 가장 큰 강점으로 드러난다. 술을 강권하는 회식자리에서, 숨 막힐 듯 쌓인 특허를 읽고 분석할 때, 나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기계다라고 속으로 외치며 버텼다. 사람들은 나의 어른스러움을 좋아해서, 난 승진하고 더 많은 돈을 벌고, 이를 모아 작은 집을 마련했다.


기뻤다. 더는 이사할 필요 없다는 사실보다, 기계 같은 내 삶이 보상받는 것 같아 뿌듯했다. 이렇게 거리만 유지한다면 나도 점점 행복해질 것 같았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나는 확실히 평안해졌다.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불면증에 시달리는 일도, 헤어짐에 아파하는 일도 없다. 나는 좀 더 정밀한 기계가 된 것 같은 효율적인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행복한지는 모르겠다. 가끔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생기는데, 그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휘젓다가 소리 없이 사라진다. 그럴 때면 나는 불치병에 걸린 환자처럼 불안해진다.


거리를 두는 건 유익하다. 날 보호하고 다음을 준비하게 하니까. 그런데 다음이 없는 삶의 마지막에 다다르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때도 죽음 대신 다른 걸 봐야 할까? 습관적으로 그렇게 할 것 같다.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회피하려 들겠지. 하지만 죽음은 단 한 번뿐이니까, 가장 빛났던 사랑처럼 소중한 것이니까, 거리를 없애고 정면에서 천천히 바라봤으면 한다. 그리고 마음을 다해 ‘아.. 이렇게 사라지는구나’라고 말하고 싶다. 그렇게 하고 나면, 병처럼 남아있던 공허함은 흩어지고, 나는 완전히 채워질 것만 같다. 나는 죽어서 완성될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독거 아재, 눈물의 오사카 여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