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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zie Kim Sep 26. 2023

나의 친애하는 육아 동지들

육아를 위해 온 마을이 도와준 이야기 - 1

아이를 낳기 전, 우리는 친구도, 가족도, 아는 사람도 없는 맨체스터에 살고 있었다. 남편의 가족들은 모두 런던에, 나의 가족은 한국에 있었고, 더군다나 2020년은 코로나가 한창이었다. 당연히 애를 낳고 나서 내 어머니가 몸조리를 도와주시러 오시거나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질 않았다.


처음에 나와 남편은 오로지 둘이서 막막하게 육아의 전쟁에 던져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아보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육아를 응원해 주었고 우리는 많은 배려와 도움을 받았다. 이 글은 그분들의 대한 헌정사이며,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단지 조부모의 도움이 아닌 사회의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에 대한 간접 경험을 공유하려 한다.




1. 같은 아파트 이웃들

우선, 내가 살던 맨체스터의 아파트를 소개해 보겠다.

우리 기준으론 전혀 아파트가 아닌 이곳을 우리는 아파트라 불렀다. 이 저택(?)에는 우리를 포함 총 9 가구가 살고 있었다.


아직 임신 7개월이었던 우리 부부는 3월의 어느 토요일에 이곳에 이사를 가게 되었고, 바로 그다음 날 영국은 락다운을 선언했다. 우리는 이사를 가자마자 이곳에 갇히게 된 것이다. 당연히 옆집, 아랫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고, 인사를 할 기회가 전혀 나지 않았다.


 사람들이 서로를 볼 수 없게 된 이상한 이 시절, 사람들은 더욱더 적극적으로 소통하기 시작했다. 모두 왓츠앱(영국의 카톡)을 이용해 서로의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잘 지내세요? 다들 아픈 곳은 없나요? 


누군가 코로나에 걸린 것 같다고 하면 이웃들이 그 사람이 먹을 음식과 생활 용품들을 집 앞으로 배달을 시켜 주기도 했다. 내가 이제 임신 7개월 차라고 알리자 이웃들의 축하와 함께 많은 격려가 쏟아졌다. 나는 얼굴도 알지 못하는 이웃들의 격려 속에서 3개월 후, 출산을 하러 갔다.


기나긴 2박 3일의 출산을 마치고, 또 5일의 입원 기간을 거쳐 드디어 집에 왔을 때, 난 믿을 수가 없었다. 내 출산 선물로 아랫집의 Beth는 직접 머핀을 구워서 집 앞에 가져다줬고, 옆집의 Ali와 아래층의 Judy는 아기 옷을 선물해 갖다 놓았다. 특히 장성한 아들 2명과 대학생 딸 1명을 키워낸 Judy는 '혹시 아이 키우다가 힘든 점이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라는 쪽지도 보내줬다.


출산 때뿐만이 아니라, 사람들은 수시로 나에게 어떻게 지내는지, 육아로 힘들진 않은지 챙겨줬고, 나중에 아기가 조금 크고 나서 락다운이 조금 느슨해져 사람들끼리 만날 수 있을 때에도 나를 불러내서 여자 이웃들끼리 펍에 가서 저녁도 함께 먹었다. (Girls' night out!). 그 당시 동네에 살고 있는 친구가 없었고, 새로운 친구를 만들 수도 없었던 시절에 나의 이웃들은 기꺼이 손을 내밀어 나에게 위안을 주었다. 


특히 나에게 고마웠던 사람은 아래층의 Judy였다. 우리 아파트는 몇십 년이 된 영국 건물이고 또 나무 마룻바닥이어서 아이가 걷기 시작할 즈음에 엄청난 소음이 발생할 것이 뻔한데도, 우리에게 한 번도 불편하다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층간 소음으로 안절부절하면서 '요즘 많이 시끄럽죠? 아기 울음 소리랑 걷는 소리가 많이 나서 미안해요'라고 쪽지와 작은 선물을 보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그 정도는 괜찮아요'라는 대답이 아닌 '정말 소리가 하나도 안 나요. 걱정 말아요'라고 대답해 줬다. '그 정도는 괜찮다'는 대답 자체로도 내가 미안해할 것을 알았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배려심 넘치는 대답 덕분에 어느 정도 죄책감을 털고 즐겁게 육아를 할 수 있었다. 





2. 옆집의 할머니 카트리오나

아, 카트리오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녀는 내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본 가장 활동적이고, 적극적이고, 젊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이제 여든 살이 넘었는데도 엄청난 에너지로 봉사 활동을 하며 살고 있다. 젊었을 때 그녀는 남편과 함께 인도에 선교 활동을 하러 간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 영국에 돌아와서도 난민들을 위한 구조 활동이나 봉사 활동을 해왔다. 


그녀가 은퇴를 하고 나서 지은 2층 집에는 빈 방이 하나가 있다. 그 방은 잠시 지낼 곳이 필요한 난민들에게 쉴 곳을 내주기 위해 일부러 집을 계획할 때 넣은 방이다. 그 방에는 각종 손님들이 지내다가 돌아갔다. 35년 전에 알고 지내던 인도인 의사, 잠시 영국에 방문 중인 일본인 첼로리스트 친구뿐 아니라, 수단에서 난민으로 들어와 지낼 곳이 없는 사람, 인도에서 온 난민 등등, 그녀는 30년, 40년 전의 친구들과 난민들 모두를 환영했다.




내가 임신 중이었을 때, 그녀가 이웃을 통해 나에게 연락을 취해왔다. (난 그녀를 모르는 상태였다). 자신이 아는 친구들이 쓰던 아기 용품들을 보낼 테니, 필요한 것을 골라 쓰라고. 영국에서는 아기 용품들을 새로 사는 것보다 친척이나 아는 사람들에게서 물려받는 것을 선호한다. (역시 골동품의 나라답다). 아는 사람이 많이 없는 우리로서는 모든 아기 용품을 사야 할 상황이었는데, 카트리오나가 이것저것 잘 쓰일 만한 것들을 보내줘서 아주 유용하게 쓸 수 있었다. 아이 있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아기 용품들은 써 보지 않고서는 아기에게 맞는지 아닌지 알 수가 없고, 그래서 사놓고 쓰지도 않은 용품들이 집에 쌓이기 마련이다. 우리는 많은 선물들을 통해 시행착오들을 줄일 수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우리 아기가 커 가면서 쓰지 않게 되는 물건들은 또 카트리오나를 통해 다른 산모들에게 기부할 수 있었다. 우리는 육아를 하면서도 크게 돈을 쓰지 않고 아이를 키운 기분이었다.




아이가 아직 돌도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기나긴 모유 수유와 사람들과의 단절 때문에 가끔 우울한 생각이 들곤 했다. 초보 엄마로서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나오지도 않고, 스트레스를 풀려고 해도 아직까지 코로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가 어려웠다. 또 다른 아이 엄마들을 만나고 싶어도, 다들 초보 육아에 지쳐서 시간을 맞추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만나기 직전에 아기가 아파서 못 나가겠다는 연락을 몇 번 받고 나면, 서로 연락을 꺼리게 된다) 그때마다 난 옆집의 카트리오나를 만나러 갔다. 그 집 정원에 문을 똑똑 두드리고 약속도 없이 나타나서, 한 시간씩 이런저런 이야기, 올 해에는 사과나무에 열매가 많이 맺었다, 이번주 주말에는 아들 부부를 만나러 런던을 간다, 지금 먹고 있는 쿠키 레시피를 공유해 주겠다, 등 아이와 관련 없는 이야기들을 하고 나면 마음이 좀 편해졌다. 그 당시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아이 엄마로서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대화였다.




나중에, 맨체스터를 떠나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집을 하루 일찍 비워줘야 해서 하룻밤은 호텔에 지내야 할 상황이 생겼다. 그 소식을 들은 카트리오나가 자신들이 그 주에 어차피 집에 없으니 우리에게 하룻밤을 지내라고 제안을 주었다. 처음에는 고마운 제안이었으나 염치 때문에 거절했다가 나중에는 결국 이웃집에 지내게 되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아주 훌륭한 결정이었다. 집을 나오면서 이것저것 마무리할 것들이 너무 많았는데, 멀리 떨어진 호텔에 묵었다면 왔다 갔다 하는 불편이 정말 컸을 것이다. 





내가 아이를 낳고 이런저런 이웃들의 호의를 받고, 많은 지원을 받은 것은 사실 특별한 케이스다. 영국의 삶이 항상 이렇게 하늘하늘 핑크빛의 동화 속 이야기 같지 않다는 것은 당연하다. (사실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딸아이를 귀여워하시는 많은 이웃의 할머니 할아버지 덕에 아이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다만, 어딘가 교훈적인 동화책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이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은 이유는, 나 역시 이런 이웃이 되고 싶어서다. 특별한 이웃들이 나에게 베풀어준 응원들은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단지 아이를 낳았다는 이유만으로도 더 따뜻함을 베풀어준 나의 육아 동지들. 그들 덕분에 나는 남편과 둘이서만 외롭게 육아를 하지 않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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