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남씨 부엌에서 내가 컸다
청.국.장. 냄새, 겨울, 따뜻함, 부드러움. 이렇게 여러 개의 연상어가 동시에 떠오르는 단어도 드물다. 생각만 해도 코를 찌르는 퀘퀘한 냄새가 눅진한 푸근한 투명 뭉게구름처럼 집안 구석구석을 파고드는 느낌이 든다. 청국장만큼 후각적으로 요란한 음식이 있을까 싶다.
우리 집에 청국장은 겨울의 음식이었다. 할머니가 삶은 콩을 아랫목에 꽁꽁 며칠 묻어두면 청국장이 만들어졌다. 우리 집에서는 시어 빠진 깍두기를 쫑쫑 썰어 넣고 깍두기가 말캉해질 때 까지 끓였다. 뭐니 뭐니 해도 청국장 국물에 절여진 소고기 조각을 씹을 때가 최고의 맛이었다. 짭쪼롬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쿰쿰하고 시큼한 국물 맛 뒤에 따라왔다. 청국장에 소고기를 넣는 일은 아주 드문 일인지라 더 기억이 강렬한지도 모르겠다.
할머니는 청국장을 내실 때는 꼭 무생채를 만드셨다. 밥 위에 무생채를 듬뿍 올리고 청국장으로 간을 하듯 몇 숟가락 넣고 비비면 한끼 뚝딱이었다. 텁텁할 수도 있을 청국장이 무생채의 아삭함과 함께 또 다른 음식으로 탄생했다.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처럼 나는 무생채만 보면 청국장이 생각난다. 어디든 언제든 무생채만 보면 속으로 생각한다. “청국장이랑 비비면 맛있겠다,”
청국장이 냄새의 음식이라는 게 문제면 문제였다. 겨울에 먹는 청국장은 방안에 걸려있는 옷에 청국장 냄새가 고스란히 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어떤 냄새보다 청국장 냄새는 잘 없어지지 않았다. 청국장을 좋아하면서도 선뜻 스스로 해 먹지 않게 된 이유가 되었다.
이십대 후반 미국생활을 할 때 청국장을 만든 적이 있다. 꼭 그렇다. 없으면 찾게 된다. 당시 한인 마켓에는 냉동된 청국장을 팔았다. 냉동 청국장으로는 내 기억회로에 저장된 그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서 청국장을 만들기로 했다. 바닥 난방이 되지 않는 아파트에서 따뜻한 온기가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곳은 냉장고 위였다. 콩을 삶고 채반에 솔솔 폈다. 이불 하나는 버릴 작정으로 채반을 꽁꽁 싸맨 후 냉장고 위에 올려두었다. 그렇게 해서 청국장을 만들었다. 그 청국장이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들어 본 청국장이 되었다. 맛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냄새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냉장고에 잘 둔다고 했던 청국장이 곰팡이가 나 버
려 몇 번 못 먹고 버린 것이 내내 아쉬웠다.
서울에 살면서 청국장은 외식 메뉴가 되었다. 청국장이 먹고 싶을 때 나는 삼청동에 있는 별궁식당을 가게 되었다. 별궁식당에는 된장찌개도 판다. 나의 선택은 늘 청국장이다. 못 만들어 먹으면 사서라도 먹을 수 있으면 된다.
얼마 전 옥천 청산면사무소 근방에서 열리는 오일장에 갔다. 생선국수가 유명한 곳이라 이미 생선국수를 먹기로 하고 오일장을 구경하고 있는데 어느 식당에선가 내가 아는 청국장 냄새가 진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몇 달 전 일인데도 여전히 선명하다. 다음 번에 가게 되면 꼭 그 식당을 찾아 청국장을 먹으리라. ‘그 다음 번’이 겨울이 아니면 좋겠다. 보이지 않는 청국장 냄새 캡슐 속에서 허우적거릴 내가 보인다. 그래도 가서 꼭 먹어보고 싶다. 청. 국.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