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남씨 부엌에서 내가 컸다
추론을 하자면 내가 도시락을 들고 다니기 시작한 것은 초등학교 4학년부터 였을 것이다. 근거는 이렇다. 3학년 어느 날 나는 학교에서 돌아와 엉엉 울었다. 숙제가 너무 많았다. 10쪽 이상 산수 문제를 풀어야 했다. 언제 다 할까 하는 걱정에 울음보가 터졌다. 꺼이꺼이. 일단 점심을 먹고 숙제를 시작했다. 한 시간 만에 끝냈다. 대성통곡이 머쓱해졌다. 이 사건에서 알 수 있듯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때는 수업이 오전에 끝났다. 즉 도시락은 필요 없었다.
두 번째 증거는 우리 학교의 학년 배치부터 출발한다. 1980년대 우리 학교에는 건물이 세 개나 있었다. 운동장을 중심으로 남쪽에는 내가 1학년을 보낸 단층 교실이 있었다. 조회용 단상을 앞에 둔 남향의 본관은 운동장을 바라보는 2층짜리 건물이었다. 본관 윗층을 6학년생이 차지하고 있었고 아래층에는 5학년생과 교무실이 있었다. 본관 뒤에는 3층 건물이 있었던 것 같다. 여기에 2학년 1층, 3학년 2층, 4학년 3층 이렇게 배치되어 있었던 것 같다. 건물 뒤로는 뒷문이 있었다.
할머니가 햇볕이 유난히 밝았던 어느 날 런치박스 딜리버리 서비스를 해 주셨던 기억이 선명하다. 메뉴는 삶은 국수. 노란 냄비에 멸치국수를 담아가지고 오셨다. 국수가 불어터질까 싶어 할머니는 내가 있던 교실과 가까운 학교 뒷문으로 오셨다. 3학년 때까지 오전 수업을 했으니까 해당 건물에서 점심 도시락을 먹는 학년은 4학년뿐이었다. 그러니까 4학년부터 도시락이 필요했을 것이다.
할머니는 내 도시락 준비에 진심이셨다. 나에게는 정말 멋진 도시락통이 하나 있었다. 할머니는 이 멋진 도시락통에 국과 밥, 반찬을 담아 가지고 오신 적도 있다. 우리 동네에서 그렇게 멋진 도시락통을 가지고 있는 아이는 나 밖에 없었다고 자신한다. 왜? 미제 철제 도시락 통이었으니까! 할아버지 환갑 때 엄마가 미국에서 내 선물로 가져다 준 틴 케이스 런치박스. 할아버지 환갑은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미제 틴 케이스 런치박스는 두해를 묵혔다가 자랑할 수 있었다. 직사각형의 틴 케이스에 어떤 캐릭터 그림이 그려져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짙은 파란색이었다. (구글 검색에 Retro Metal Tin Lunch Box 라고 입력을 하면 결과값으로 각종 캐릭터 그림이 그려진 내가 가졌던 런치박스와 비슷한 모양의 도시락통들이 나타난다.)
런치박스 구성품은 보온병이 전부다. 보온병에 스프나 커피 정도를 담고 나머지 공간에는 샌드위치를 넣게 디자인 된 듯하다. 그래서 보온 기능은 없었다. 할머니가 이 런치박스에 맞는 어떤 밥통과 반찬통을 찾으셨는지 참으로 궁금하다. 미제 틴 케이스 런치박스의 수명은 짧았다. 6학년 때 이미 타원형 양은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 겨울에 교실 중앙에 있던 조개탄 난로에 올려놓을 수 있는 도시락통은 양은 도시락 뿐 이었다. 중학생이 되자 삼촌들이 사용했을 것이 분명한 커다란 직사각형 양은 도시락도 내가 가지고 다녔다.
할머니의 유별난 도시락 반찬 집념은 내가 중학생이 되어서도 계속되었다. 밥상이 깜짝 계란후라이는 기본이었다. 남쪽 지방에 사는 이모가 보내준 상어고기가 조림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한번은 쌈을 먹으라고 상추를 넣어 주시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인 듯한데 상추를 먹고 5교시 내내 졸아버린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 6년간 상추를 입에 대지도 않았다.
면 소재지임에도 우리 동네에는 공업고등학교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은근히 여상 수석입학을 노려 할머니 할아버지를 설득하기도 했다. 나는 고집을 부려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버스를 한 시간 타고 가는 도청 소재지의 여고로 통학을 시작했고 할머니의 기상 시간은 그만큼 빨라졌다.
도시의 아이들이 들고 다니는 도시락통은 달랐다. 양은 도시락통이 아닌 플라스틱 도시락통을 가지고 다녔다. 특히 코끼리표 보온도시락통은 내 것과는 사뭇 달랐다. 크기도 컸지만 밥이 더 따뜻했다.
할머니의 도시락은 고등학교 2학년까지였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엄마와 살기 위해 미국으로 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3학년 때 나는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가 있는 도시의 변두리 어느 작은 아파트에서 하숙을 했다. 하숙집 아주머니께서는 점심 도시락은 싸주셨고 저녁은 매점에서 사먹으라고 돈을 주셨다. 더운 여름에 밥이 쉬기도 한다고 하셨다. 이미 나보다 나이 어린 남학생이 한명 더 하숙생으로 있었기 때문에 네 개의 도시락을 매일 준비한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힘든 일이다.
어떻게 하숙생활을 했는지 기억이 거의 없다. 부엌 옆 조그만 방, 앉은뱅이 책상, AFKN을 듣던 작은 카세트플레이어 정도. 어떻게 그 집으로 가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숙비는 엄마가 보내줬지만 반년 정도 용돈을 친구 어머니가 주셨다. 매달 용돈을 받으러 친구 집에 갔었다. 지금의 나보다 분명 젊으셨을 친구 어머니는 어떻게 내게 그런 호의를 베푸실 생각을 하셨을까. 고등학교 졸업 후 한 번도 매달 용돈을 주셨던 친구 어머니를 뵌 적도 없다. 지금 떠오른 건 하숙집 아주머니께서도 내게 몇 만원의 하숙비 페이백을 해주셨다는 것이다. 일기장을 뒤져보니 당시 하숙비는 10만원, 친구어머니의 한달 용돈은 5만원이다.
회사에 도시락을 들고 다니기 시작한 것은 사먹는 밥을 소화기관이 힘들어해서다. 정작 나는 도시락에 뭘 넣을까 보다는 도시락 통과 도시락 가방에 더 신경을 썼다. 얼마간 내 쇼핑의 검색어는 보냉백, 도시락, 도시락통, 런치박스 같은 것이었다. 외국에 갈 일이 있으면 도시락통 코너를 슬슬 돌아다니곤 했다. 이건 집착이다. 도시락을 먹을 일이 얼마나 있다고. 그래도 가끔 도시락 반찬을 만들 때 마다 할머니 생각을 했다. 도시락을 들고 집을 나서면 어린 시절도 돌아간 듯 할머니가 생각났다. 도시락 집착도 유전이 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