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일 타국화랑방랑기 - 에스발루알 미술관 앞 데니스 오펜하이머의 집
바다가 늘 함께 하는 곳이라는 점 외 시내로부터 도로 교통이 좋은 숙소를 찾아다녔다. 일정 중 하루는 시내와 발데모사 투어를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 Canyamel 바다는 동쪽 끝에 위치했지만 팔마 중심으로 곧장 연결되는 큰 도로가 있어 시내투어를 하거나 섬의 다른 곳을 둘러보기에 편리했다.
마요르카의 자동차 도로는 크게 방사형 모양으로 남쪽의 팔마 시내로부터 뻗어가는 큰 대로가 4곳이 있고 그대로를 거미줄처럼 작은 도로들이 연결하고 있었다. 큰 대로 네 곳 중 동쪽으로 향하는 MA-15 도로를 쭉 따라가면 시내부터 곧장 이곳까지 1시간 1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다.
종종 다른 지역 바다를 보기 위해서라도 섬 중심부를 거쳐 이동해야 했는데 숙소 가까이 연결된 이 대로를 통해 이동하니 편리했다. 큰 도로가 끝까지 이어지지 않는 섬 주변 지역은 작은 도로를 통해 들어가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험한 드라이빙 코스들이 많아 어려웠다.
그중 동화 같은 마을 발데모사 역시 아름다운 경치만큼 운전하기 어렵기로 악명이 높은 곳이다. 야간 주행 시에는 가로등이 없고 선로가 보이지 않는 좁은 왕복 2차선 길에 굽이굽이 산길을 주행해야 할 위험을 감수해야 하니 일찍 귀가하거나 숙소 위치를 잘 선정하는 것이 좋다.
하루는 바다를 충분히 즐기고 마요르카 팔마 중심지로 향했다. '에스 발루알 현대 미술관 Es Baluard Museu d'Art Cotemporari de Palma'을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입구를 들어서는 길에 커다란 야자나무와 오래된 성벽이 독특한 인상을 주었다. 야자나무는 여유롭고 따뜻한 태양과 함께 파도가 부서지는 모래사장 해변의 상징이 아닌가. 그런데 이 야자수가 오래된 성벽 사이에 있으니 이질적이면서도 삭막한 공간 속 환기를 시키는 묘한 균형감을 준다.
이곳은 16세기부터 과거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요새와 함께 현대의 건축물이 어우러져 예술가들을 위한 다양한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야자나무도 모던한 건물도 이 요새 성벽과는 모두 이질적이라고 생각되었지만 또 한데 같이 어우려 저 있으니 이곳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과거의 역사적 유산과 자연환경을 존중하며 설계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이러한 모습들은 이후 여행 중 다른 전시관들에서도 볼 수 있었다.
프랑스 파리의 '부르스 드 꼬메르스 미술관 (Bourse de Commerce)'은 과거의 상업 거래소 유산의 복원과 동시의 안도타다오 만의 특색이 보이는 구조로 새로운 전시공간 간의 균형이 있다.
또한 '아를 국제 사진전'은 도시 전체에 도시를 상징하는 고대 로마시대 옛 유적지와 지하 동굴을 비롯해 현대 건축물까지 다양한 공간 속에서 현대의 작가들의 사진과 영상이 어우러지도록 전시를 기획한다.
23년 7월 당시 에스 발루알 미술관에는 4개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마리아 라이(Maria Lai) 작가의 직물과 재봉 실을 활용한 서적, 회화 및 설치 미술 작품들을 볼 수 있는 Woven Writing
알바로 페르디세스 (Álvaro Perdices) 작가의 박물관 내 숲을 구성한 전시 Paths in the Afternoon: Initiation in the Woods
페드로 G. 로메로 (Pedro G. Romero)의 발레아스 제도 이주민 노동자들의 영상 작품의 스토리와 시나리오를 보여주는 ‘A for Archipelago’
페루 개념예술의 선구자 조지 에두아르도 엘리슨 (Jorge Eduardo Eielson)의 매듭을 활용한 작품을 볼 수 있는 The Vertical Knot
전시를 둘러보고 옥상 전망대에서 시내 전경을 둘러보았다. 전시규모가 크고 다양할 뿐 아니라 오래된 요새에서 시내를 관람할 수 있다는 장점 하나만으로도 방문할 만한 곳이다. 박물관 성벽을 따라 미술 조형물들과 야자수가 어우러져있다 멀리 대성당과 항구도 보인다. 뜨거운 태양이 계속되었지만 전망대 안에 들어가니 그나마 좀 괜찮았다.
유럽의 문명이 시작된 고대 로마시대부터 자리를 지켜온 건축물들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닌 시민들의 삶의 터전이며 공존하는 문화유산이다. 긴 시간 삶을 영위하면서도 이 유산을 지키기 위한 수많은 고민과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을 것이다.
유럽에서는 도심을 산책하기만 해도 과거의 향기를 느끼며 여행하는 기분을 주는 곳들이 많다. 가끔 서울의 빽빽한 빌딩 숲 그리고 빌라촌과 아파트단지를 걸으며, 우리만의 멋이 사라진 것에 대해 아쉬움을 느낀다. 우리나라는 개화기와 일제 강점기를 6.25 전쟁으로 인해 전통 건축이 사라지고 서양식 건축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옥마을과 일부 전통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한옥을 짓고 있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수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미술관을 나서면 보이는 광장에는 20세기를 대표하는 현대미술의 거장 미국의 '데니스 오펜하임 Dennis Oppenheim' 작가의 작품 거꾸로 된 집 'Device root out evil'이 있었다.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에도 꽤 많이 설치되어 있다. 1988년 88년 올림픽을 기념해 올림픽공원에 설치된 'Impersonation Station (위장지)' 작품을 시작으로 경기도 광주, 창원, 부산 등 국내 전국 곳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2017년도 해운대구에 있는 그의 유작 'Chamber - 꽃의 내부 (2011)’ 가 흉물스럽다는 이유로 무단 철거 폐기 되었다. 무려 8억 원이 투입되었고 작가가 암투병 중 유작으로 만든 작품을 10년이 채 되지 않아 폐기해 버렸다는 것이다.
해운대구의 작품에 대한 관리 보수 시스템의 부족, 유족들과의 어떠한 협의가 없이 철거한 점, 작품이 훼손되었단 이유로 예술작품의 가치를 상실했다고 판단한 점 모두 국제적으로 우리나라의 문화 행정 수준의 민낯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아직 우리의 과거의 유산들과 함께 공존하는 지식과 노력 그리고 애정이 부족하다.
팔마의 아름다운 균형과 대비되는 사건이 머릿속을 매워 먹먹한 마음을 안고 거꾸로 된 집을 한 바퀴 돌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