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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바리 Oct 15. 2019

패배의 역사에도 교훈은 있다.

[영화] 남한산성(The Fortress, 2017)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 임금의 몸이 치욕을 당하는 날에, 신하는 임금을 막아선 채 죽고 임금은 종묘의 위패를 끌어안고 죽어도, 들에는 백성들이 살아남아서 사직을 회복할 것이라는 말은 크고 높았다.
- 소설 「남한산성」


김훈 작가의 담담한 역사소설 <남한산성>이 스크린으로 옮겨질 때 약간은 의아했다. <명량>처럼 이순신의 기념비적인 승리를 그리거나, 사도세자, 광해군 등 사극 각색에 적합한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1636년 인조 14년, 조선의 왕이 47일간 고립되어 버티다가 결국 항복하고 나와 삼궤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로 끝난 게 <남한산성>의 이야기다.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 최명길(이병헌)과 척화파 김상헌(김윤석)은 각자의 논리로 인조(박해일)를 설득한다. 고개를 숙이더라도 나라와 백성이 사는 길이 먼저라는 최명길과 치욕스러운 오랑캐에 항복하느니 죽는 게 낫다는 김상헌은 서로 뜻을 굽히지 않고, 남한산성에 포위된 조선인들은 점점 추위에 괴로워한다. 원작 역시 길고도 처참한 겨울의 고통을 고스란히 담아냈는데 영화도 똑같은 전략을 취했다. '지는 전쟁'을 화려하고 극적으로 그려내기도 어렵기에, 황동혁 감독은 묵묵히 잊고 싶은 치욕의 역사, 조선의 패배를 복기했다. 마치 혼란스러운 최근 한국이 나아가야 할 길이 무엇인지 화두를 던지듯이 말이다.


영화 <남한산성>은 차갑고 또 차분하다. 시작부터 매서운 겨울이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희망보다는 절망과 쓰라린 눈보라만 가득한 느낌이었다. 최명길의 첫 등장도 화살이 빗발치는 청나라 군대에 나 홀로 서있는 초라한 뒷모습이었고, 김상헌 역시 얼음길을 알려주려는 노인을 무참히 베고 묵묵히 서있는 암담한 뒷모습이다.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분위기는 초라함과 비참함이 가득하다. 한국 사극 영화라면 으레 등장하는 신파 코드나 영웅적인 모습도 딱히 도드라지지도 않았다. 흔히 말하는 국뽕이나 억지가 없다. 같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한  <최종병기 활>만 보더라도 누이를 구하기 위해 혈혈단신 청나라 정예부대를 박살 내는 영웅이 등장하는데 말이다. 그나마 격서를 성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 생사를 넘나들며 맹활약하는 서날쇠(고수)만 제외하면 지극히 인간적이고 평범한 이들이다. 추위에 괴로워하고, 배고픔에 허덕이고, 싸움을 앞두고 두려워하는 이들이 가득한 영화는 그래서 더욱 와 닿고 현실적인 맛이 있다. 아울러 행궁, 성첩, 대장간은 물론 청나라 군막, 부대 갑옷 등을 생생하게 만든 것도 영화 몰입에 큰 도움을 줬다.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는 것이옵니다. 만백성과 더불어 죽음을 각오하지 마시옵소서. 삶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대의와 명분도 있는 것이 아니옵니까
-최명길

칸은 스스로를 황제라고 칭하고 전하를 칸의 신하로 칭하라 요구할 것이옵니다. 명길은 전하를 앞세우고 적의 아가리 속으로 들어가려는 자이옵니다. 죽음에도 아름다운 자리가 있을진대 하필 적의 아가리 속이겠습니까?
-김상헌


소설을 스크린으로 생생하게 재현해낸 게 장점이라면, 영화의 백미는 두 배우의 불꽃 튀는 '썰전'이다. 역동적이고 손에 땀을 쥐는 대규모 전투는 없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맥없이 지고 마는 전투보다는 두 대신의 날이 선 토론이 더욱 흥미진진하다. 세간의 여러 논란이 있긴 했지만 본업인 연기에서는 누구도 욕할 수 없는 이병헌, 김윤석이다. 조선의 앞날을 두고 임금 앞에서 서로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는 장면은 그 자체로 긴장감을 증폭시킨다. 상대방의 논리에 하나하나 맞서면서도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그저 말로만 불꽃 튀게 싸우는 이들은 어마어마한 힘을 내뿜는다. 어느 한쪽이 맞다고 편을 들어주기보다는 감독은 한 걸음 물러선 관찰자의 입장에서 각자의 명분, 논리를 동등하게 보여준다. 이들의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유약한 모습을 보이는 박해일도 탁월한 캐스팅이었고, 각자의 위치에서 그저 노력하는 이시백 장군(박희순), 서날쇠 등도 자연스럽게 녹아들더라.



외교로 전쟁을 막을 수 있는데도 민족의 굴욕을 초래한 자들은 역사 속 죄인이다.
VS
나라 힘이 나약하고 군주가 무능하면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 몫이 된다.


같은 영화를 봐도 해석하는 건 가지각색이다. 군주의 나약함, 외교적 무능, 혹은 정보기관의 부재까지. 각자의 진영에서 입맛에 맞게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이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어갈지는 미지수다. 오히려 사사건건 걸림돌이 되어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를 반복하는 영의정(송영창) 같은 무능력한 위정자가 많아 보인다. 역사 속에서 그들은 절대 자신의 특권을 내놓지 않았고, 그렇게 명분을 외치면서도 누구 하나 나서서 목숨을 걸지 않았다. (실제 김상헌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결 시도에 그쳤다.) 오히려 그들이 사직을 위해 내건 것은 백성의 목숨, 즉 남의 목숨이었다. 난세에 항상 현실을 직시하고, 균형 있게 미래를 도모해야 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오히려 북한, 중국, 일본, 미국 등 더욱 복잡한 정세에는 현명한 자세가 필요하다. 계급의 간극, 정보의 비대칭성 등 다양한 걸림돌이 사라진 21세기인 만큼, 위정자의 무능력에 답답해하지만 말고 앞장서서 그들을 감시하고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있다. 패배의 역사에서도 분명 배울 건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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