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안드레아 피를로, 알렉산드로 알치아토
"유명한 선수들을 수집하는 방법이 시즌 티켓을 파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경기에서 이기게 하는 것은 그 뒤에 있는 접착제다. 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비다. 군사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승리는 전선 뒤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골을 적게 허용하는 팀이 경기에서 이긴다." - 10. 발롱도르
2006년 월드컵 우승, 유로 2012 준우승, 챔피언스리그 2회 우승, 세리에A 6회 우승.
명문 이탈리아가 이뤄낸 기적 같은 성공의 중심에는 안드레아 피를로가 있었다. 2006년에는 강호 브라질, 개최국 독일이 주목받았고, 2012년에는 압도적인 상승세의 스페인이 우승하리라 예측했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카데나치오를 중심으로 피를로가 중원에서 번뜩이는 맹활약을 펼치며 연이어 우승, 준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티키타카를 기반으로 엄청난 점유율을 가져간 스페인을 상대로 펼친 1대1 무승부는 피를로의 진가가 드러난 경기였다. 무적함대 스페인은 이니에스타, 파브레가스, 실바 등 스트라이커 없이도 화끈한 공격력을 자랑했지만 이탈리아의 끈끈한 수비에 맥을 못췄다. (비록 다시 만난 결승전에선 마음껏 4골을 퍼부었지만.) 그리고 역습의 중심에는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피를로가 훨훨 날아다니며 오히려 이탈리아가 먼저 1골을 넣었다. 차분하고 안정적인 볼키핑, 절묘한 타이밍에 공간을 열어주는 패스, 노련하고 지능적인 템포 조절. 결국 파브레가스의 골로 동점을 만들었지만 그 경기에서 가장 돋보인 선수는 축구도사 피를로였다. 21번의 털이 덥수룩한 선수는 더 넓게, 더 멀리, 더 빠르게 생각하며 플레이했다.
"나는 축구계의 진부한 표현인 "오직 팀의 성공이 중요하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말을 견딜 수가 없다. 그건 개인적인 야망이 없는, 클래스가 부족하거나 개성이 부족한 사람들이나 하는 성가신 불평 같은 말이다. 나에게도 물론 팀이 아주 큰 부분이지만, 만약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잊어버린다면 나는 결국 팀 동료들에게 폐를 끼치고 말 것이다. 많은 꿈이 모여서 승리를 이뤄내는 것처럼 많은 개인이 모여서 팀을 이루는 것이다. 그리고 정말 운이 좋다면 그것은 역사가 되기도 한다." - 16. 피를리뉴
<나는 생각한다, 고로 플레이한다>. 피를로의 자서전은 그의 플레이스타일에 걸맞은 제목이었다. 부딪히고 뒹구는 난폭한 그라운드에서 피를로는 차원이 다른 선수처럼 생각하며 공을 찬다. 피를로는 조율하는 플레이메이커를 뜻하는 '레지스타', 수비 바로 앞선에서 공을 뿌려주는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라는 포지션의 상징이 되었다. 특출난 시야와 패싱력, 축구 센스는 물론 수비력과 템포 조절 등 다양한 역량이 요구되는 포지션에서 그는 오히려 가장 자유롭고 화려했다. 그는 어릴적 부터 천재였다. 브레시아 유소년 클럽에서부터 같은 팀원에게까지 시기와 질투를 받은 그는 철저하게 자아가 강한 선수로 자라났다.
악의적인 거친 태클과 자신을 향한 패스의 비율이 점점 바뀌는 걸 즐기는 선수였다. 축구에 관한 자신의 철학과 능력에 확실한 믿음이 있었다. 그렇기에 팀의 성공만이 전부라고 말하는 건 클래스가 부족한 선수들의 불평이라 단호하게 말한다. 월드컵이나 챔피언스리그 결승처럼 정말 중요한 경기 전에도 15분의 스트레칭은 쓸데없다고 투덜거린다. 하지만 그는 피를로다. 그렇기에 다소 오만할 수도 있는 멘트도 이해할 수 있다. 그라운드에 들어서면 적어도 자신의 몫은 다하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전담 마크맨을 붙여야만 하는 존재감의 선수다. 마치 공격력도 준수했던 맨유의 박지성이 모기처럼 피를로만 따라다니는 역할을 수행했듯이.
"그는 그라운드의 모든 곳을 누비고 다녔다. 공격에 가담하려고 하다가 그게 잘 안 되면 나에게 그 자신을 내던졌다. 그는 자신의 양손을 내 등에 대고 그의 존재를 알리며 나를 위협하려 했다. 그는 볼을 봤지만 그게 왜 있는지는 몰랐다. 그의 눈에는 그저 미확인된 왔다 갔다 하는 물체였을 것이다. 맨유는 그로 하여금 날 막게 했고, 그게 박지성이 생각한 오직 한 가지였다. 자신의 임무에 대한 그의 헌신은 거의 감동적이었다. 그는 이미 그 스스로의 능력으로 유명한 선수였음에도 그 자신이 갖고 있는 고유의 능력을 기꺼이 억제한 채 경비견이 되는 데 동의한 것이다." - 15. 집시
피를로의 개인적인 취향이나 선수들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이미지와 다르게 플레이스테이션에 빠져 살거나, 가투소를 지독하게 괴롭히는 모습은 의외였다. 자는 가투소 놀래키기, 가투소를 향해 소화기 뿌리기, 가투소의 문법 놀리기. 이정도면 악동은 발로텔리가 아니라 피를로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피를로와 가장 궁합이 잘 맞는 선수는 가투소였다. 그라운드를 누비며 시종일관 상대팀과 부딪히고 태클을 날리며 공을 따내는 파이터 가투소. 그리고 그렇게 얻어낸 공을 빠르게 전방으로 뿌리거나 여유롭게 공을 돌리며 점유율을 높여가는 피를로. AC밀란의 전성기를 이끈 중심에는 두 선수의 환상적인 궁합이 있었다.
그밖에도 모델 포스를 뽐내며 가장 스타일리쉬하다고 소문난 이탈리아 선수단의 더러운 습관도 모두 적었다. 돌체앤가바나로 온몸을 휘감으면서 항상 낡고 냄새나는 축구화를 신는 질라르디노, 반드시 가위를 처음 사용해야하는 로시, 축구화를 정확하게 균형을 맞춰 세워두는 포글리오. 하지만 이들의 미신은 인자기에 비하면 약과다. 그는 악취가 강렬한 똥을 경기 전에 드레싱룸에 싸는 게 득점의 비결이라 믿었다! 한편, 그는 브라질 주닝요에게 영감을 받은 무회전 프리킥의 비밀도 살며시 공개했고, 그의 이적을 둘러싼 여러 빅클럽의 공세도 털어놨다.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는 물론이고 카타르에서까지 그를 원했던 건 확실히 그는 클래스가 있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최악의 순간에도 교훈은 늘 존재하며 상처를 더 깊게 파고들어 한줄기 희망이나 지혜의 말을 찾아내는 것은 도덕적인 의무다. 그 경험으로부터 뭔가 우아한 문장을 만들어내서 앞으로의 여정이 덜 쓰라리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이스탄불의 일에 대해 그렇게 해보고자 노력했으나, 이 말 외에는 찾아낼 수가 없었다. 씨발." - 12. 이스탄불 신드롬
발롱드로, 칼치오폴리, 이스탄불의 기적(아니 피를로에겐 악몽이겠지만), 파넨카킥. 그가 경험한 수많은 경기에 대한 솔직하고 직설적인 이야기로 자서전은 가득하다. (특히 리버풀에게 당한 이스탄불의 악몽에는 아무리 멋지게 말하려 해도 포장하기 어려웠나 보다. "씨발"이란 한마디로 챕터가 끝나니깐!) 마초 같으면서 시인 같은, 소년 같으면서 철학자 같은 피를로는 확실히 특별한 선수였다. 그는 MLS에서도 환상적인 경기 조율을 보여주며 클래스를 보여주며 은퇴했다. 맨 마지막에 실려있는 '번역노트'에는 선수, 경기, 팀, 리그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실려 있어 피를로를 잘 모르는 사람도 쉽게 따라갈 수 있다.
마르키시오, 베라티, 데 로시 등 아주리 군단은 중원에 특급 선수가 많았다. 하지만 피를로의 빈자리를 단 1%의 아쉬움도 없이 채우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가 지닌 상징성과 그의 발끝에서 시작되는 다양한 공격/수비 전술의 파괴력은 쉽게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최국 프랑스, 디펜딩챔피언 스페인, 피파랭킹 1위 벨기에, 2014 브라질 월드컵 우승국 독일. 이들의 상승세에 비교하면 여전히 이탈리아는 도전자 입장이다. 하지만 피를로가 뛴다면 적어도 해볼 만하단 자신감이 생겨날 것이다. 피를로라면 뭔가 해줄 수 있단 기대가 생기기 마련이니 말이다.
"옳은 선택을 했어, 피를로."
내 아버지는 21일에 태어났다. 21일은 내가 결혼식을 올린 날이자, 세리에A 데뷔전을 치른 날짜이기도 하다. 그 숫자는 내 커리어 초기부터 나의 등번호였고 나는 절대 그 번호를 놓친 적이 없다. 그 숫자는 내게 행운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그것이 이 책이 20장에서 끝나는 이유다. 나는 이다음의 장이 아직 쓰이지 않은 미래에 있을 또 다른 이야기와 경험으로 채워질 여백의 페이지였으면 한다.
그리고 한 자기는 확실하다. 나에겐 펜이 있다. - 20. 21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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