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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바리 Dec 07. 2019

블록버스터가 아닌 리더 시저의 고뇌가 담긴 정치극

[영화]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 2014

○ 평화는 깨졌다. 아니 애초에 없었다.


유인원이 인간을 지배하는 충격적인 설정의 팀 버튼표 '혹성탈출'도 나쁘진 않았지만,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은 단순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가 아니었다. 시리즈 본연의 문제의식, 상상력으로 돌아가 완벽한 리부트에 성공한 훌륭한 작품이었다. 원작의 흐름을 따라가되, 인간들의 실험으로 지능을 얻게 되며 고뇌하는 '시저'를 등장시켰고, 여름철 때려부수는 게 전부인 트랜스읍..읍과는 분명 결이 다른 SF영화였다. 이는 이야기 처음으로 되돌아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튼튼한 밑바탕을 새로 다진 덕분이었다. 물론 기초가 아무리 튼튼해도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 뻔하거나 안전한 방식에만 의존하면 그저 그런 영화가 되기에 십상이다. 하지만 <렛 미인>으로 인정받은 맷 리브스는 시리즈의 바통을 무난하게 이어받으며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을 성공적으로 빚어냈다.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은 도시가 아닌 자연에서 시작한다. 바이러스 '시미안 플루'로 인류는 극소수만 살아남고, 폐허가 된 도시에서 조용히 살고 있다. 반면 지능이 뛰어난 시저(앤디 서키스)를 중심으로 유인원들은 숲에서 그들만의 사회를 이루고 성공적으로 번식했다. 10년간 서로 만나는 일 없이, 평화롭게 지내던 전혀 다른 두 종족은 우연히 숲에서 만난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암묵적으로 넘지 않았던 서로의 선을 넘어선다. 그들이 총을 들고 숲으로 들어온 이유는 단 하나다. 도시에 전력을 모두 써버려서, 숲에 있던 댐에서 비상전력을 끌어와야 했기 때문이다. 말콤(제이슨 클락)은 침착하게 시저와 소통하며 두 종족의 공존이 가능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인간에게 실험을 당한 상처가 있는 유인원 코바(토비 켑벨), 조용히 전쟁을 준비하는 인간 드레풔스(게리 올드만)는 평화는 그저 헛된 꿈이라 여긴다. 결국 두 종족은 목숨을 걸고 다시 도시를 전쟁터, 불바다로 만든다. 마치 평화는 애초에 존재할 수 없다는 듯이.



○ 'No'가 아닌 'Go'를 외칠 수밖에 없는 리더 '시저'의 운명


1편에서 가장 소름 끼치는 장면은 시저가 "No"를 외치는 순간이었다. 그저 어리광을 피우고 약자의 입장에서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던 유인원 시저. 그가 단순한 유인원이 아닌 하나의 자아를 지닌 인간 그 이상의 존재로 다시 태어났단 걸 표출하는 비범한 장면이었다. (<인셉션>의 결말 이후 영화관이 웅성거렸던 건 처음이었다.) 반면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의 명대사는 유인원 무리를 통제하며 일사불란하게 지휘하며 외치는 "Go"다. 시저는 탁월한 지능과 인자한 성품, 압도적인 힘으로 지도자로서 다수를 이끌어 나가는 진정한 리더였다. 근력, 사회성 등이 떨어지는데다가 잔혹함에서만 상대적 우위가 있는 인간은 시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영화 말미의  본격적인 전투보다는 오히려 시저를 둘러싼 전쟁 직전의 긴장감이 더 기억에 남는다. 스케일 자체가 다른 액션, 대놓고 뽐내는 할리우드 CG, 시도 때도 없는 슬로 모션처럼 흔히 범하는 과잉의 연속은 덜하다. 하지만 클라이맥스 전투보다 일촉즉발의 대치 장면이 더 강렬한 건 다소 김이 빠지기도 하다. 액션 영화라기보다는 하나의 정치극을 봤다는 느낌이랄까? 물론 뻔한 도심 전투보다는 어두운 분위기의 숲 속 전투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인상적이었다. 한편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의 아련한 추억이 담긴 시저의 집, 행복하고 따스했던 인간 가족과의 일상이 담긴 캠코더를 보는 순간 울컥했다. 일관된 코바의 행동도 물론 이해가 가지만, 쉽사리 시저가 평화주의를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런 추억 때문이었다.



○ '시저'. 이름만큼이나 무시무시하고 강렬한 존재감


엔딩 크레디트 맨 처음 등장하는 이름은 게리 올드만도 제이슨 클락도 아닌 '앤디 서키스'다. 실제 등장하는 배우가 아닌 모션 캡처 연기를 한 숨은 배우가 맨 처음 나오다니. 하지만 관객이라면 누구나 수긍할만한 등장이다. (심지어 남우주연상에 '시저'의 이름을 올려야 한다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였다.) 골룸으로 모션 캡처 연기란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그는 리더 '시저'를 훌륭하게 그려냈다. 외모, 성별, 인종, 목소리 그 아무것도 그의 역할 선택이 제한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세트가 아닌 로케이션 현장에서 발로 뛰며 앤디 서키스는 비극적인 리더의 심리 변화를 세심하게 표현했다. <혹성탈출> 시리즈를 보며 기술력과 연기력이 더해진 최고의 시너지 효과를 엿볼 수 있었다. 특히 비 오는 날씨에서 등장한 유인원들의 젖은 털과 거친 숨소리는 몰입감을 더욱 높였다.


개인적으로 명작인 1편보다는 아쉽지만, 3편의 결말로 이어주는 유연한 역할은 나쁘지 않게 했다. 애초에 <혹성탈출 : 반격의 서막>에서 기대한 건 대규모 전투 장면이 아니라 시저가 왜 인간과 맞서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이었기 때문이다. 인간 측의 적색 분자, 유인원 측의 강경파도 자신만의 논리가 있고, 이유도 분명하다. 타인을 제압해야 자신이 살아남는다는 아주 근본적인 본능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물론 시저와 말콤은 타자와 공존할 수 있단 가능성을 믿었기 때문에 끝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 역시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둘이 힘을 합친다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믿고, 아니 믿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반격의 서막을 올랐고, 그들이 돌이킬 수 없는 전쟁을 어떤 식으로 마무리되는지 남았다. 1편의 충격적인 시작이 용두사미가 될지, 화룡점정이 될지는 3편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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