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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바리 Dec 11. 2019

지독히 현실적인 연애, 완전히 비현실적인 연애 공간

[영화] 연애의 온도 (Very Ordinary Couple, 2012)


<연애의 온도>는 상당히 비현실적이면서 현실적인 영화다. 연애가 펼쳐지는 공간 자체, 훤칠한 등장인물은 비현실적이지만 그들이 빚어내는 사랑, 아니 헤어짐의 단계는 매우 현실적이다. 대부분 영화는 서서히 사랑이 싹트는 순간부터 이별이란 위기를 맞이한다. 하지만 <연애의 온도>는 이와는 정 반대다. 시작부터 두 남녀는 남들 앞에선 쿨한 척하다가 혼자 술주정은 기본이고 울고불고 슬퍼한다. 이별의 순간부터 조금씩 뒤로 거꾸로 가는 구조는 색다르고 신선하다. 인서트 컷으로 인터뷰 가 삽입되어 영화 자체의 리듬감도 인상적이다. 노덕 감독의 신작 <연애의 온도>는 <연애의 목적>, <러브 픽션>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한국형 코믹 멜로의 색다른 모습이었다.


장영(김민희), 이동희(이민기)는 3년 차 사내 커플이다. 분주한 은행에서 몰래 데이트를 하는 풋풋한 연애담은 회상으로만 등장한다. 오히려 그들은 헤어지고 난 뒤 서로에게 찌질함의 극치를 선보인다. "빌려준 돈을 갚아라, 노트북을 돌려 달라." 따져대는 동희. 그를 향해 장영은 노트북을 부숴서 착불로 보내버리고, 맥주를 얼굴에 부어버리며 복수한다. 동희는 끈질기게 영을 따라다니며 빈정거리고 짜증을 유발한다. 장영 역시 헤어진 남친의 페이스북을 뒤져보고, 데이트 현장까지 몰래 따라간다. 누가 낫다 할 것 없는 보복과 구차함의 연속이다. 그때 동희는 새로운 여대생 효선(하연수)을 만나고, 장영은 직장 상사 민차장(박병은)과 묘한 관계로 발전한다. 하지만 어느덧 헤어진 연인을 그리워하며 걱정하기 시작하고 둘은 다시 만난다. 똑같은 이유로 비슷하게 헤어질 것을 예감하며.



미니 홈피에서 페이스북으로 옮겨갔을 뿐. 대한민국에서 이별한 커플들의 절반 이상이 할 법한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커플 요금제 해지, 페이스북 눈팅으로 이어지는 구남친, 구여친에 대한 "자니?" 공식은 매우 현실적으로 영화 속에 반영되었다. 핸드헬드 카메라를 사용해서인지 몰라도 두 주인공의 사랑과 이별의 순간은 무섭도록 현실적이다. 사소한 이유가 중대한 문제로 이어지는 게 바로 연애다. 그들 주변의 코미디도 매우 훌륭하다. 생활밀착형 웃음을 선보인 손차장(라미란)은 여전히 빛났고, 그녀 못지않은 김강현도 등장했다. 지금 당장 가장 가까운 은행으로 달려가면 분명 있을법한 외모로 어찌나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하는지. 냉전 기류가 흐르는 둘 사이를 오가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은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다.


많은 이들이 느낀 감정은 다름 아닌 부러움이다. 이런 회사는 신의 직장이다! 동희는 직장 상사를 두드려 패고, 징계성교육도 박차고 나온다. 영 역시 단합 대회에서 몰래 빠져나오고, 회식 자리는 참석하는 법이 없다. 막무가내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무난하게 근무를 이어가는 걸 보면 비현실적이란 생각이 가득하지만, 몰입에는 크게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한편 김민희는 자신 만의 확실한 캐릭터를 만들어가고 있는 게 확실하다. <화차>에서부터 상당한 내면 연기를 보여준 그녀는 확실히 비슷한 나이대 배우 중 탄탄한 연기력을 자랑한다. 항상 패셔니스타 이미지가 강했는데 <연애의 온도>에서는 코믹 연기는 물론 작위적이지 않은 현실적인 연기 내공을 보여줬다.


 너, 나 사랑하긴 했니?


김민희는 울먹이며 말한다. 역설적으로 영화 <화차>에서 남편 이선균이 아내 김민희에게 건넨 말이었다. 고개를 떨구며 가로저었던 기억이 나는데 이번에는 김민희가 묻는다. 분명 영과 동희는 서로 사랑했고, 그리워했다. 하지만 이젠 이별의 순간이 찾아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사실을 직감한 것뿐이다. 대한민국 수많은 커플들이 영화를 보고 마지막 순간을 상상했을 것이다. 커플끼리 보기보다는 친구끼리 봐야 할 영화라고 당부한 관람평에 깊이 공감한다. 항상 달콤할 수 없는 이 죽일 놈의 연애를 그려낸 <연애의 온도>는 지독히도 현실적이다. 많은 이들의 가슴 한편에 지워져 갈 이별의 순간을 소환하는 영화다. 연애 초반의 감정처럼 뜨겁지도,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하는 것처럼 차갑지도 않은 그저 그런 미지근한 온도. 타성에 젖어 그저 그런 만남을 이어가는 순간이 어찌 보면 제일 위태로운 정점인 것이다.


특히 마지막 놀이공원 장면은 긴 여운이 남는다. 의무감에 데이트하며 투덜거리는 동희, 애써 이별이 두려워 서운한 감정을 숨기는 영. 결국 영은 위태로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빗속으로 걸어 나간다. 그리고 그대로 주저앉아 펑펑 울고 만다. 사랑에 빠지는 게 찰나의 순간인 것처럼 사랑이 끝나는 것도 정말 특별하지 않은 이유 때문이다. 바람을 피거나, 심하게 다투는 것도 아니라 그저 익숙함이 권태로 이어져 결국 상대와 멀어지는 순간. 이별은 찾아오는 법이다. 언젠가 이해하지 못한 무미건조했던 이별의 이유를 조금을 알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의 영원함을 믿지 않은 지 오래고, 연애의 설렘 역시 잠시라는 법칙에 물들어간다. <연애의 온도>로 현실을 마주하고 가슴 먹먹한 이별의 감정이 피어오른다면, 한없이 설레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달래길 추천한다. 결국 인간이란 이별의 슬픔을 망각하고, 새로운 사랑으로 두근거리는 존재기 때문이다. 넘어지고, 일어서고, 그러다 보면 언젠가 단짝을 만날 수 있다. 아니, 적어도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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