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소설의 명물은 <무진기행>이오.

[도서] 무진기행, 김승옥

by 샘바리

<무진기행>은 눈이 아닌 귀로 즐긴 익숙한 작품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조잡한 아이리버 MP3에 나름 한국문학 전집 오디오북을 넣고 다니는 허세를 부렸다. (등하굣길에 언어영역 공부를 한다는 쓸데없는 자기만족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내내 기묘한 배경 음악과 살며시 읊조리는 남성의 목소리로 무진기행을 읽었다, 아니 들었다. 희뿌연. 매연이 한데 뒤섞인 정체 모를 안개를 가르며 자전거를 탔을 때, 무진이란 가상의 공간이 아마 이러지 않을까 상상하곤 했다. 교과서에 실린 한국 문학은 꽤 재밌었다. 오지선다형 문제에서 답을 한 가지 고르는 일이 대부분 스트레스였지만, 문학 작품은 달랐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숨은 의미를 하나 더 알려주는 듯해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광장>에서 제3 국을 택하는 주인공의 마지막에 놀랐다면, <무진기행>은 첫 장면이 매력적이었다.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가 뿜어내 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생명 연습, 건, 역사, 차나 한 잔, 다산성,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 서울의 달빛 0장.


다른 듯 닮았고, 닮은 듯 다른 10편의 작품이 실린 김승옥 단편선을 읽었다. 무진기행, 서울 1964년 겨울, 염소는 힘이 세다, 서울의 달빛 0장. 순서대로 읽는 내내 책 속의 활자가 입체적인 공간으로 눈앞으로 펼쳐지는 신기한 경험을 했다. 내용 자체는 크게 충격적이거나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거부감이 들기도 했지만 시대적 상황을 감수하면 그럭저럭 넘길 수 있을 정도였다. 무진으로 떠나와 서울로 다시 돌아가기 전 밀애를 즐기는 주인공, 어제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사내를 만나 한바탕 진하게 놀고 돌아가는 사내, 겁탈당한 누이를 걱정하며 성장하는 어린이, 유명 연예인과의 이혼을 경험한 사내. 이들의 뻔하디 뻔한 이야기가 놀랍도록 사랑받는 이유는 다름 아닌 한글의 감각적으로 다루는 천재 23살의 김승옥 때문일 것이다.


드라마로도 각색된 <무진기행>


1960년대 문학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한국 문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준 첫 한글세대 소설가.' 김승옥을 수식하는 말처럼 그의 소설을 무척 세련되었다. 마지막 장, 마지막 문장의 곁에 놓인 연도 (1964)를 (2014)로 고친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문장 하나하나가 끊기지 않고 술술 익히고, 서울이란 공간을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신경숙 작가는 그 문체의 아름다움에 <무진기행>을 또박또박 필사했고, 김지하 시인도 "김승옥의 작품은 감수성의 일대 혁신이었고, 문장의 일대 파격이었다."며 그를 칭송한다. 나도 글을 잘 쓰고 싶다. 쓰기는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읽기에 편한 글을 쓰고 싶다. 천재가 틀림없는 김승옥의 소설 속 퇴폐미, 쓸쓸함이 가끔은 부럽다. 2020년 서울을 그리며 연작 소설을 다른 작가들이 돌아가면서 써보는 것도 참 신선한 시도일 것 같다. 그나저나 2020년 서울은 어떤 모습일까? 1964년 서울보다 바쁘지만, 그리 다를 게 없는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무진기행을 떠난 주인공 윤희중은 근대적 인간의 표본이었다. 잘 나가는 집안에 장가를 간 윤희중은 졸지에 제약회사 임원이 되며 벼락 출세한 인물이다. 2박 3일간 아내를 두고 내려온 무진에서 음악 교사 하인숙과 일탈을 꿈꾼다. 서울로 떠나고 싶어 하는 그녀를 연민하고 동정하면서도, 매몰차게 떠나 현실의 아내로 다시 돌아간다. 부끄러움을 느끼며. 하지만 그 부끄러움은 잠시 스쳐지나가는 위선이었고, 다시 비겁하고 뻔뻔한 모습으로 일상에 적응해나간다. 마치 그 당시 모든 근대인이 그러했듯이. 1960년대의 서울, 그리고 반세기가 넘게 흐른 지금도 그런 이중적인 인간상은 여전히 그대로다.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우리가 원래 그렇게 비겁한 거라고 위로하고 합리화하면서 지나가는 것이다. 아마 <무진기행>은 그저 그 시대상을 반영하는 소설이 아닌, 인간 본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시대를 관통하는 날카로운 소설로 기억될 것이다.


몽환적이고 탈일상적인 공간의 상징 안개. (출처 : Laura Lefurgey-Smith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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