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
미래에서 기다릴게.
내가 상상했던 일본의 여름은 항상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전부였다. 매미 소리가 왕왕 울려 퍼지는 학교 운동장. 자전거로 등하굣길을 가득 메운 교복 입은 학생. 한없이 푸르고 맑은 여름 하늘과 눈부시게 내리쬐는 태양 빛. 철도 건널목 앞에서 분주하게 기다리는 직장인. 더불어 학창 시절 아름답고 풋풋한 첫사랑의 로망은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완성했다. 쾌활한 여자 '사람' 친구와 캐치볼을 주고받으며 방과 후를 즐기는 남학생. 저 멀리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수줍어서 말도 못 하는 후배. 이과를 갈지, 문과를 갈지 고민하기보다는 여름 방학이 오면 어디로 놀러 갈지 이야기하는 아이들. 2006년 개봉한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너무나 여운이 깊은 영화였다. 도서관에서 몰래 PMP에 인강이 아닌 호소다 마모루 감독의 아름다운 애니메이션을 본 뒤 뻐렁치는 마음(!)에 눈물이 고였었다. 어느덧 감수성 풍부했던 사춘기 고등학생은 30살이 넘은 아저씨가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0년 만에 재개봉한 내 인생의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영화관 큰 스크린에서 봤다. 마치 마코토가 힘차게 시간을 거슬러 돌아가기 위해 달려가듯, 그때의 아련한 추억을 되새기고 싶었다.
돌아가려고 했는데 어느덧 여름이 되어버렸어.
천방지축 여고생 마코토는 언제나 당차고 명랑하다. 활발하고 시원시원한 성격 덕분에 코스케와 치아키와도 캐치볼을 하며 여름방학 계획에 부풀어 있다. 그러던 중 우연찮은 기회에 과거로 돌아가는 '타임 리프'를 경험한다. 어느덧 방법을 터득한 마코토는 매일매일 접하던 사소한 일들을 마음껏 되돌리며 즐거워한다. 요리 실습 시간에 사고를 치는 것도 피하고, 지각은커녕 여유롭게 도착해 쪽지 시험도 가뿐하게 풀어낸다. 노래방에서 목이 쉬도록 10시간 도안 놀 수도 있고, 동생이 먼저 먹은 푸딩을 돌아가서 마음껏 먹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녀 이모의 말대로 누군가 이득을 본다면 누군가는 손해를 보고 있었다. 마코토 대신 요리 실습에서 사고를 친 친구는 왕따에 괴로워하고, 어렵사리 꺼낸 치아키의 고백도 아무도 모르는 없던 일이 되어버린다. 하지만 아쉬움이 아닌 엄청난 후회가 밀려오는 사건이 찾아온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를 코스케와 유리가 타고 가 사고를 당하는 순간, 마코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를 막기 위해 미래에서 온 치아키는 본인의 정체를 고백하며 마지막 남은 타임리프 기회를 써버린다.
Time waits for no one!
영화의 원작 츠츠이 야스타카의 소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타임 리프란 하나의 장르까지 만들어낸 명작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타임 리프에 대해 훤히 꿰고 있는 이모 카즈코다. (마코토와 대화를 나누며 클로즈업되는 액자 속 사진이 바로 이모의 소녀 시절이다.) 드라마, 소설, 영화 등 다양하게 재탄생한 <시간을 달리는 소녀>. 그중에서도 호소다 마모루의 애니메이션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는 이유는 바로 아름다운 음악이다. 피아노 전주가 흐르는 순간부터 아련해지는 '여름 하늘(Opening Theme)'. 사람도 많지 않고, 야구는 물론 맑은 하늘도 없는 미래를 치아키가 차분히 설명할 때 흐르는 '정적'.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 발걸음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은은하고 따뜻한 'Garnet'. 그리고 청량한 목소리로 유명한 오쿠 하나코의 첫음절이 피아노 선율에 녹아드는 순간, 요동치는 마음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변하지 않는 것') 심지어 치아키가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부르는 'Time waits for no one' 마저도 귓가에 맴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에서 음악은 단순히 영화의 부가 요소가 아니다. 영화를 '보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노래를 들으면 아름다운 마코토의 추억을 '함께 기억하는 것'까지 나아가는 신비한 힘이 있다.
응. 금방 갈게. 뛰어 갈게!
'타임 리프'란 SF 영화가 사랑하는 소재가 등장하지만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성장 드라마다. 풋풋하고 서툴고,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첫사랑의 추억이 가득 담긴 그런 영화다. 마코토는 매일 투닥거리며 친하게 지내던 치아키가 넌지시 건네는 고백에 괜히 설렌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몇 번이나 고백을 되돌리지만 막상 친구인 유리와 사귀는 걸 보며 입이 빼쭉 나온다. 10대 소년, 소녀 감성을 이토록 정확하고 아름답게 그려낸 영화는 없었다. 완벽하지 못하고 항상 후회가 남는 게 학창 시절 풋풋한 첫사랑이다. 시종일관 밝은 느낌의 유쾌한 영화는 보는 이들에게 흐뭇함을 선물한다. 한편 많은 이들이 이때를 그리워하지만 영화에 계속 등장하는 메시지처럼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Time waits for no one.) 지나간 과거, 혹은 다가올 미래에 목메기보다는 현재에 충실해야 한다.
영화 속 세상은 무척이나 평범하다. 가족, 친구와 함께하는 소소한 일상이 전부다. 시간을 되돌려 어마어마한 미래를 바꾸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먹고 싶은 걸 다시 먹고, 내가 보고 싶은 사람을 한번 더 보는 것이 마코토의 순수한 타임 리프다.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건 평범한 일상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마코토는 이과를 갈지, 문과를 갈지도 모르며 장난처럼 호텔왕이 되겠다고 외친다. 하지만 영화 막바지에 마코토는 자주 놓치던 야구공을 당차게 잡아내며 확신에 찬 눈빛으로 하늘을 바라본다. 마코토에게 목표가 생겼다. 시간을 달려서 소중한 사람을 언젠가 다시 만나는 일이다. 미래에서 기다릴 치아키를 만날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사춘기 소녀는 티 없이 맑고 아름다운 여름을 지나 한 뼘 자랐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