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샘바리 Apr 05. 2020

방구석 모험에서 배운 아름답게 이별하기

[영화] 업 (Up, 2009)

이별은 누구에게나 두렵고 슬프며 피하고 싶은 일이다. 잊혀지는 것이 두렵고, 버려지는 것은 괴로우며, 그리워해도 만날 수 없는 상황은 모두가 피하고 싶은 일이다. 하지만 픽사는 언제나 '이별을 아름답게 맞이하는 방법'을 뭉클하고 유쾌하게 그려낸다. <토이 스토리 3>(2010)의 우디는 훌쩍 커버린 앤디를 떠나보내며 "잘 가, 파트너(So long, Partner)"라고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인사이드 아웃>(2015)에서 상상의 친구 빙봉은 "나 대신 그녀를 달에 데려다줘(Take her to the moon for me)"라며 본인을 희생하고 기쁨이를 떠난다. <코코>의 마마 코코를 감동적인 노래(Remember me)와 함께 떠나보낼 때도 마찬가지다. 픽사에게 이별은 비극적인 끝이 아니다. 그저 현재를 살게 만드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픽사는 '이별'을 받아들이고, 더 진한 감동과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시종일관 유쾌하고 따뜻하며 가슴 뭉클한 <업>에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탐험가 찰스 먼츠를 동경하는 칼은 소꿉친구 엘리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둘은 '모험'이란 같은 꿈을 꾸며 결혼하고, 평범하지만 행복한 하루하루를 보낸다. 비록 아이를 낳지 못한단 현실을 마주하지만, 남미 파라다이스 폭포로 떠나자고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살아간다. 하지만 현실의 벽에 가로막혀, 모험은 미루다가 뒤늦게 비행기 표를 마련했을 때 이미 엘리는 하늘나라로 떠난다. 고집불통 78살 노인으로 혼자 남은 칼은 모험은커녕 그저 그런 칙칙한 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던 중 이사를 떠나야 할 상황에 놓이자 엘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천 개의 풍선을 집에 연결해 과감히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경로 봉사 배지를 얻기 위해 집을 방문한 꼬맹이 러셀이 불청객처럼 귀찮게 동행한다. 러셀의 끊임없는 수다, 질문에 지쳐갈 때쯤, 말하는 강아지 더그, 뭐든지 삼키려 드는 새 케빈까지 탐험에 합류한다. 꿈에 그리던 우상 찰스 먼츠를 만나고, 파라다이스 폭포에 다가가지만 칼은 석연치 않은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업>을 최고의 픽사 애니메이션, 아니 최고의 애니메이션, 나아가 최고의 영화로 꼽는 이유는 바로 오프닝 시퀀스 때문이다. 5분가량의 영상에는 두 부부의 인생 전체가 따스하게 녹아있다. 타이어가 펑크 나고, 집이 부서지고, 아내가 아플 때도 언제나 서로는 서로에게 큰 힘이 되어준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서로를 위하는 부부에게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 그 이상의 소중한 추억이다. 초반 5분에 푹 빠져 부부의 인생을 파노라마처럼 감상했다면, 칼의 비이성적인 행동(집을 팔라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거나, 케빈이 붙잡혀가는 위기의 순간에 불타는 집을 구하러 가거나.)을 이해할 수 있다. 오프닝 시퀀스는 그 흔한 대사 한 마디 없다. 그저 아카데미 음악상에 빛나는 마이클 지아치노(Michael Giacchino)의 'Married life'가 왁자지껄한 결혼식부터 홀로 남겨진 쓸쓸한 칼의 모습까지 완벽한 강약 조절을 돕는다. 내가 바라는 결혼 생활을 펼치는 이들을 볼 때마다 뭉클하고, 다시 봐도 흐뭇하다. 시간만큼 덧없는 건 없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것만은 아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라면.


아이러니하게도 사랑하는 이와 함께한 추억을 모두 던져버리는 순간 <업>의 명장면은 탄생한다. 거센 풍파를 겨우 뚫고 보니 무거운 집을 들어 올릴만한 헬륨 풍선이 남지 않았다. 막무가내 러셀은 잡혀간 케빈을 구하러 가겠다고 위험하게 풍선을 타고 날아가버렸다. 그때 칼은 칼은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던 사랑하는 엘리의 사진 액자, 함께 편하게 앉았던 소파 등을 밖으로 던져버린다. 끝까지 함께 안고 가고 싶던 과거의 물건들을 훌훌 던져버리고, 현재를 살아가기 위해서 선택한 것이다. 과거의 추억을 원동력 삼아 칼은 현재를 산다. 그런 칼은 멋진 어른이다. 귀찮고, 힘들고, 짜증 나도 천진난만한 아이 러셀, 바보 같은 실수를 계속하는 더그,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케빈을 지켜내기 위해서 달리고, 외치고, 위험을 무릅쓴다. 평생 싸움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온화한 풍선장수가 자신의 예전 우상을 상대로 나름(?) 박진감 넘치게 지팡이를 휘두른다. 소중한 것을 지켜야 할 순간에는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게 진정한 어른이란 걸 증명한다.



멋진 모험을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
이젠 당신의 새로운 모험을 떠나봐요. 사랑해요
(Thanks for the adventure, now go have a new one! Love.)


결단력 있는 칼의 선택은 역시 아내 엘리의 메시지 덕분이었다. 슬픔에 잠겨 모험일지를 넘겨 보다가 칼은 마지막 장에서 엘리의 한 마디를 발견한다. 비록 늘 꿈꾸던 폭포에 함께 오지 못했지만. 엘리는 칼과 함께 인생이란 모험을 행복하게 마무리했다. 반드시 비행선을 타고 전 세계를 누비고, 죽을 고비를 넘기는 스릴 넘치는 모험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둘이 함께한 사소한 일상, 평범하고 반복되는 하루하루가 과정 그 자체이고, 모험이었다. 평생 소망했던 폭포에 도착했지만 뭔가 공허한 마음이던 칼은 비로소 그 가치를 깨닫고 선택한다.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미래로 통하는 가장 소중한 시간인 현재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버리기로. 그리고 떠나보내기로. 모험은 성공인지, 실패인지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지막을 향해 함께 하는 과정이 더 소중한 법이다. 그리고 행복은 멀리 있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아니라 사랑하는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사소하지만 소중한 가치다. 이런 <업>은 유쾌하고 감동적인 이야기로 풀어낸다.


떠나자! 모험의 세계로!
(ADVENTURE IS OUT THERE)


모든 어른들도 한때는 꿈이 있었다. 바빠서, 힘들어서, 피곤해서, 여유가 없어서 애써 마음 한구석에 숨겨두고 잊고 지낼 뿐이지. 여기서 꿈이란 단순히 직업적인 선택을 적어내는 장래희망이 아니다. 좋아하는 일, 그저 상상만으로도 가슴 뛰는 일, 마냥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푹 빠져 있는 일이 꿈이다. <업>을 어른들을 위한 동화라고 부르는 이유는 잊고 지내던 꿈을 살짝 보듬어주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일'보다 '해야만 하는 일'에 치여사는 게 대다수의 평범한 일상이다. 꼭 모든 걸 포기하고 당장 어디론가 떠날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과거의 영광에 취해 현재를 비난하고 자괴감에 빠질 필요도 없다. 그저 불확실한 미래를 위해 현실을 힘겹게 버텨내지 말고, 소소한 행복을 찾아 나서는 게 어떨까?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는 일상이 요새는 더 감사하고 행복하다. (그렇다고 일확천금의 로또나, 호화스러운 여행이 싫다는 건 절대 아니다.) 한때 결혼 상대자를 만날 때 중요한 요소들('상대가 당신의 자식이라도 자랑스러워야 한다, 30년 동안 같이 산책할 수 있어야 한다')을 많이 듣곤 했다. 이 모든 것의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 "당신이 좋은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말엔 여전히 자신이 없다. 하지만 운 좋게 내 곁에 누구보다 자랑스럽고, 평생 같이 조잘거리며 산책할 수 있는 동반자가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시행 중인 4월 어느 날에 집 안에서 사랑하는 이와 <업>을 함께 보며 나름의 모험을 떠난 만족스러운 하루다.





매거진의 이전글 풋풋하고 서툴고, 그래서 더욱 아름다운 첫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