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설국열차 (Snowpiercer , 2013)
<설국열차>는 평론가와 대중을 아우르며 모든 영화팬의 엄청난 관심을 끌었다. <플란다스의 개>부터 <괴물>까지. 디테일의 최고봉 봉준호는 큰 실패 없이 차근차근 마니아를 형성했다. 사소한 의상이나 배경 하나에도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그는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영리하게 담아내는 감독이다. 예를 들면 <괴물>의 장례식 소동처럼 한과 흥이 어우러진 묘한 감정 말이다. 이번 영화는 전 세계를 겨냥한 초대형 프로젝트다. 누군가는 봉준호 감독답지 않은 영화라고 하고, 누군가는 역시 봉준호 색깔이 담긴 영화라고 평한다. 개인적으론 스케일이 커지고, 한국이란 국적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봉준호 감독의 디테일은 살아있었다고 느꼈다. 송강호와 크리스 에반스가 함께 달리는 모습은 애초부터 기대를 모았다. 노아의 방주와 다름없는 설국열차 속에 다양한 계급 사회, 선택된 자와 선택받지 못한 자의 '균형'을 담아낸다. 봉 감독은 일직선의 공간에서 걷잡을 수 없이 풍부한 은유와 함의를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기상 이변을 막기 위한 CW-7이 터지고, 지구는 새로운 빙하기에 접어든다. 꽁꽁 얼어붙은 지구 상에 유일한 생존자들은 기차에 탄 자들뿐이다. 1년에 지구 한 바퀴를 돌며 끊임없이 앞으로 달리는 기차 속에서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혁명을 꿈꾼다. 굶주리고 억압받는 꼬리 칸의 사람들은 17년간 절대권력 윌포드에 지배를 받고 있다. 단백질 덩어리를 씹으며 스테이크 맛은 애초에 잃어버린 이들. 앞쪽 칸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어린아이들을 차례차례 데려간다. 오랜 시간 혁명을 준비한 커티스는 마침내 기차의 심장인 엔진을 점령하기 위해 과감히 한 칸씩 앞으로 나아간다. 길리엄(존 허트), 에드가(제이미 벨), 타샤(옥타비아 스펜서)는 제각각 목표를 가지고 묵직하게 함께 돌진한다. 기차를 설계한 남궁민수(송강호), 열차와 함께 태어난 요나(고아성)의 도움이 더해지며 앞으로 나아갈수록 놀라운 세계가 펼쳐진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지만, <설국열차>는 높은 기대를 충분히 충족시킬 힘이 있다. 처음에는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무한한 세계가 놀라웠다. 그리고 다시 보니 곳곳에 숨어있는 은유와 다채로운 디테일에 즐거웠다. 크리스 에반스와의 등빨 경쟁에서도 밀리지 않는 묘한 매력의 송강호는 역시 존재감이 컸다. 귀찮음과 짜증 섞인 욕설 하나하나에 반가움이 먼저 느껴지더라. <괴물>에서 이미 부녀 지간으로 호흡을 맞춘 고아성도 어색하지 않은 연기를 펼쳤다. 크리스 에반스의 독백은 제법 인상적이었고, 매우 어려운 감정 표현을 적절히 해냈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는 역시나 메이슨(틸다 스윈튼)이다. "Passenger!"를 외치는 깐깐한 중년 여성이 어찌나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던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은 소름 끼칠 정도였다. 짧은 분량에도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이유가 있었다.
<설국열차>에서도 삑사리의 미학은 살아있다. 마치 <괴물>에서 박해일이 중요한 순간에 화염병을 떨어뜨리듯이, 크리스 에반스도 격렬한 전투 중에 크게 미끄러진다. 물을 벗어나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제의에 사용된 물고기를 밟고 쓰러진다. 액션이 화려해져도 봉준호 감독은 '삑사리'의 미학을 포기할 수 없었나 보다. 한편 한 칸 한 칸 앞으로 나아갈수록 상상치도 못한 세계가 펼쳐지는 건 대단히 놀라웠다. 빈민굴 같은 꼬리 칸부터 세뇌 교육을 펼치는 알록달록한 학교 칸, 평온한 스시 칸, 식물이 자라는 칸, 크로놀에 중독된 환락의 클럽 칸. 매번 놀라울 정도로 새로운 세계를 꾸며놓은 상상력은 재기 발랄했다. 봉 감독이 예산만 허용되었다면 기차 높이에 맞게 목을 꺾은채 자란 기린이 사는 동물 칸도 만들었을 거라고 인터뷰했다. 흰 눈이 가득한 외부와는 정반대로 다채로운 세계를 '기차'에 담아내려는 그의 재치, 그리고 이를 이뤄내는 뚝심은 정말 부러울 따름이다.
영화는 엄청난 해석과 토론을 불러일으켰다. <1984>의 빅 브라더, 월스트리트 점령, 인류의 진화 과정, 계급투쟁, 신자유주의, 맬서스의 <인구론>, 보수와 진보. 영화 외적으로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는 계속될수록 좋다. 특히 클라이맥스에 윌포드와 커티스의 대화는 하나의 철학적 토론을 보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들게 했다. 여러 가지 해석을 읽어보고 다시 본 <설국열차>는 첫 관람과는 다른 재미가 있었다. 해석이 다양한 만큼 정답은 없다. 누군가는 마지막 장면이 희망이라고 볼 테고, 어떤 이는 절망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설국열차>가 오락적 요소를 100% 충족하는 영화란 점은 분명하다. 일단 액션 자체도 훌륭하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장도리 액션 장면을 오마쥬한 기차의 대결투는 매우 화려하고 거칠다. 좁은 공간에서 액션도 단조로워질 수 있는데 공간의 특성에 맞춰 박진감 넘치는 액션을 창조했다.
송강호는 진지한 가운데 피식 터지는 웃음을 끊임없이 만들었고, 반전의 묘미도 제법 크다. '영어'라는 언어적 장벽을 어떻게 해결할까 궁금했는데 통역기를 이용한 점은 식상했지만 무난했다. 게다가 고아성은 뜻밖에도 한국어 연기보다 영어 연기가 더 자연스러워서 큰 문제가 없더라. 가장 봉준호 감독답지 않은 영화라는 평이 많지만, 그것은 익숙한 한국 영화의 표현 방법이 많이 드러나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절대 <설국열차> 자체가 허술하거나, 빈틈이 많은 영화란 뜻이 아니다. <설국열차>는 봉 감독의 이전 작품을 뛰어넘는 최고의 대작은 아니지만, 매우 훌륭한 걸작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2013년 상반기에 가장 많은 울림을 준 영화였다. 결국, 체제에 순응하기보다는 판도 자체를 뒤흔드는 발상의 전환. 오래 두고 생각해 볼 문제다.
꼬리칸과 일등칸이 나눠진 채 계속 흘러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힘을 지닌 이들의 지속적인 교육과 세뇌에 결국 꼬리칸 사람들의 분노는 서로를 향해 있었다. 불합리와 갈등의 제공자는 오히려 선망의 대상, 혹은 범접할 수 없는 이들로 커버 린지 오래였다. 아울러 남을 깎아내리고 시기하며, 불편한 진실을 애써 모른척하는 못된 버릇으로 같은 계급 사이의 피로도만 높여왔다. <설국열차>는 부를 중심으로 한 계급 갈등이 점점 깊어지는 2019년에 더욱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화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이들에게는 그저 재미난 문화생활이겠지만, 하루하루가 경쟁의 연속이고 까딱하면 더 아랫칸으로 떨어질 운명인 평범한 이들에게는 제법 무서운 영화다. 나는 지금 과연 어디를 향해 묵묵히 일을 하고 있을까? 불편한 진실을 누군가의 거짓이라고 애써 외면하며 현실에 안주하고 있지 않을까? 세대, 성별, 부, 지역 갈등이 갈수록 심해지는 요즘 더욱 냉철하게 나 자신을 돌아봐야겠다는 결심을 숙제로 남겨주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