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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바리 Dec 26. 2019

다 쓰고 남은 '잉여' 청춘의 재기 발랄한 투쟁기

[영화] 잉투기 (INGtoogi, 2013)


독립 영화의 반란, 재기 발랄함 그리고 뜨거움


"한국 독립 영화 역사의 새로운 챕터가 시작된다."(박찬욱 감독), "또 한 번 터졌다."(류승룡). 유인석, 문소리 등 다양한 배우와 감독이 입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독립 영화를 관람했다. 비주류, 신인 감독에게 전하는 의례적인 덕담, 친분 과시용 칭찬쯤 되려나 했지만 영화를 보고 나니 그게 아니란 걸 알겠더라. 류승완-류승범의 형제 영화인 계보를 잇는 엄태화-엄태구 형제는 무척 신선하고 시종일관 폭발적이다. 지난해 미장센 단편영화제 심사위원 만장일치 대상을 받은 엄태화 감독은 꼰대가 아닌 신세대의 시각에서 소재를 발굴하고 집중해서 파고들었다. 공감이 가는 부분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도 공존하지만 적어도 영화를 보고 나면 씁쓸한 웃음의 여운이 남는다.


칡콩팥 태식(엄태구)은 아이템 거래를 하기 위해 약속 장소에 나갔다가 봉변을 당한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거친 말싸움을 했던 상대 젖존슨이 기습적으로 태식을 공격한 것이다. 굴욕적으로 얻어맞는 장면은 고스란히 온라인에 퍼졌고 태식은 모두의 조롱거리로 전락한다. 씻을 수 없는 치욕과 두려움에 괴로워하던 태식은 결국 칼을 품고 젖존슨을 찾아다닌다. 격투기 선수 겸 BJ 여고생 영자(류혜영), 부유하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르는 희준(권율)이 태식의 조력자다. 태식은 서서히 젖존스의 뒤를 캐고 다니며 가수 생활을 했던 과거까지 알게 된다. 마침내 격투기를 배우며 복수의 칼날을 간 태식은 잉투기 무대에서 상대를 기다린다. 하지만 짜릿하고 개운한 복수가 아니라 찝찝하고 의도치 않은 결말만 남을 뿐이다.



먹방, 현피, 악플. 키보드 워리어,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


엄태화 감독은 2013년 온라인에서 번져있는 문화를 스크린으로 옮겼다. 다 쓰고 남았다는 의미의 단어 '잉여'로 대표되는 청춘의 세태를 현실적으로 그려냈다. 아무 의미 없는 악플을 달고 낄낄거리는 키보드 워리어. BJ가 욱여넣는 음식을 보며 별풍선을 날리고 즐거워하는 유저, 인신공격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결국 실제 주먹다짐, 심한 경우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는 현피. 치열한 스펙 경쟁의 이면에는 매우 평범하고 보통의 청춘들이 숨 쉬고 있다. 물론 낙인이 찍힌 채 오프라인에서는 조용히 지낼 뿐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익명성의 공간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나름대로 찾는다는 점이다. 20, 30대 청춘은 누구보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존재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은 그렇지 않다. 줄을 세우고, 남들과 항상 비교하며 깎아내리기 급급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인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그릇된 방향으로 표출되는 사례들이 결국 인터넷 범죄다. 영화 속에서 주목한 잉여 인간은 게임 레벨이 높아 상대 캐릭터를 죽이면, 혹은 자극적인 말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상대의 반응을 이끌어내면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느낀다. 단 한 번도 칭찬받지 못한 청춘, 자기 뜻대로 인생을 살지 못했던 청춘에 인터넷 공간은 천국과 다름없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캐릭터를 키우고, 댓글을 마음대로 달며 자존감을 확인하고 우울함을 달랠 뿐이다. 태식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젖존슨 역시 부당한 계약으로 상처 받고 온라인에서 아픔을 마취하는 태식과 무척 닮은 존재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단순히 찌질한 태식의 행동 하나하나가 아니라 그런 행동을 불러온 사회 전반의 구조다.



20대 청춘의 우왕좌왕 잉여 생활


태식은 나름대로 자신의 방식대로 세상에 맞서기로 한다. 젖존슨과 똑같이 비열하게 기습을 하는 것도 아니고, 모니터 뒤에서 강한 척을 하는 게 아니라 실제 현실로 나오라고 소리친다. 불안함과 공포를 담은 배우 엄태구의 거친 느낌은 영화 내내 응축되어있다가 마지막에 폭발한다. 사실 결말이 그리 공감되거나 인상적이진 않았지만 마음껏 날뛰는 태식의 모습은 신선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고 나서는 찝찝한 느낌이 강한 결말이라 크게 와 닿지 않았는데, 감독 인터뷰를 보고 나니 조금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설프게 교훈을 주거나, 무조건적인 희망을 얘기하는 영화가 아니다. 나와 같은 고민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미화하지 않고 보여주는데, 그 지점에서 작지 않은 위로를 받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뭔가를 해결하고 행복한 결말을 짓기보다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담담하지만 적나라하게 현실을 보여주는 방식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한편 스마트폰을 먼저 꺼내 들고 방관자, 제삼자의 입장에서 문제의식 없이 불행을 전파하고 그것을 돌려보며 낄낄거리는 현실이 무섭다. 물론 뭣 하러 골치 아픈 일에 끼어들겠냐마는 상대의 불행이 자신의 행복으로 변질되고, 이를 확산하며 더 큰 쾌감을 느끼는 구조는 분명 문제가 있지 않을까?



그 막 한 말이 저한테는 희망입니다.


한편 날 것 느낌이 강하게 나는 태식도 좋았지만 개인적으로 희준도 눈에 띄었다. 조정석을 연상시키는 자유분방한 연기뿐 아니라 캐릭터 자체가 주는 매력 때문이었다. 희준은 "같은 집에 산다고 다 같이 사는 건 아닌 것 같아."라고 읊조리는 태식과 다르다. 무작정 남미 이민을 꿈꾸는 홀어머니와 어렵게 사는 태식과 달리 희준은 남부럽지 않은 집에서 자랐다. 버젓한 차, 직장도 있는 평범한 희준은 격투기에 푹 빠져 재미를 느낀다. 처음에는 태식을 도와준다는 이유였지만 서서히 '즐거움'이란 가치를 거친 격투기에서 찾아낸다. 희준은 뭘 해야 할지도 모르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보통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하고 싶은 걸 찾아내자 웃는다. 희준은 격투기 대회에서 얻어터지고, 관장님의 선수 생활은 소질이 없다는 이야기에도 그저 웃는다. 무기력함이 아닌 자존감과 자신감을 한 줄기 찾았기 때문이다. 새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수확이란 이야기에 공감했다. 한편 어느덧 다양한 영화, 드라마에 출연하며 스타가 된 엄태구, 류혜영, 권율의 풋풋한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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