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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바리 Dec 20. 2019

소문난 잔치에 볼거리 풍성한 미스터리 밀실 살인사건

[영화] 나이브스 아웃 (Knives Out , 2019)


2019년 추운 겨울은 당연히 디즈니 <겨울왕국 2>의 세상이다. 'Let it go' 열풍에 이어 OST 'Into the Unknown'은 역시나 음원 차트에서 승승장구 중이다. 가뿐히 1118만 관객 돌파를 이어가고, 쉽사리 엘사 열풍이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와중에 놓치면 후회할 영화가 입소문을 타고 관객의 호평을 받고 있다. ("지금 겨울 왕국 볼 때가 아닙니다"라는 과감한 홍보 문구까지.) 미스터리 추리 스릴러 <나이브스 아웃>은 로튼 토마토 신선도 지수 99%, 개봉 2주 만에 월드와이드 박스오피스 1억 2천만 불 흥행 돌파하며 저력을 뽐내고 있다. <스타워즈 : 라스트 제다이>의 감독 라이언 존슨은 자신만의 주특기 미스터리 장르로 명성을 되찾았다. (라스트 제다이는 스타워즈 역사상 최악이란 팬덤 비판에 휩싸였다.) 관객의 호평은 물론, 골든글로브 최우수 작품상 후보 등에도 오르며 건재함을 증명했다.


<나이브스 아웃>은 베스트셀러 미스터리 작가의 85번째 생일에 발생한 자살 혹은 살인사건을 그린 추리물이다. 할리 트롬비(크로스토퍼 플러머)는 추리 소설로 부와 명예를 모두 이뤄낸 인기 스타지만, 하루아침에 시체로 발견된다. 스스로 목을 그은 자살인 줄 알았지만, 날카로운 형사 브누아 블랑(다니엘 크레이그)이 조금씩 사건을 파고드니 비밀들이 하나씩 드러난다. 소설 판권을 팔고 싶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답답해하는 아들 월트(마이클 섀넌). 자신의 외도를 딸 린다(제이미 리 커티스)에게 알릴까 전전긍긍한 사위 리처드(돈 존슨). 손녀 멕(캐서린 랭포드)의 학비를 핑계로 돈을 빼돌려온 조니(토니 콜렛). 망나니처럼 제멋대로 행동하는 손자 랜섬(크리스 에반스). 생일 파티에 모인 가족들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범행 동기가 충분하고, 가장 가까이서 함께 한 요양사 마르타(아니 디 아르마스) 역시 수사망에 오른다.



추리소설 덕후 라이언 존슨 감독의 팬심이 가득 담긴 걸 2시간 내내 느낄 수 있다. 감독은 10년 전부터 <나이브스 아웃> 시나리오를 쓴 만큼 디테일한 곳까지 떡밥을 잔뜩 숨겨두고, 전체적으로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를 훌륭하게 이어갔다.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나이브스 아웃>은 전통적인 미스터리 영화 클리셰로 가득하다. 석연치 않은 밀실 살인 사건, 억만장자의 어마어마한 유산, 이를 노리는 탐욕스러운 자식들의 다툼, 조수와 함께하는 날카로운 사립 탐정, 퍼즐 조각처럼 숨겨져 있는 단서와 막판 반전. 자칫 뻔한 장치를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 넘치게 이어가는 것은 훌륭한 개연성이 큰 역할을 한다. 추리소설을 활자가 아닌 영상으로 옮길 때의 단점은 상쇄하고 매끄러운 편집으로 오히려 장점으로 재해석했다. 관객의 궁금증을 무작정 자극하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결말 부분에서 박수를 자아낸다.


두 번째 매력은 역시나 화려한 캐스팅,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배우들의 열연이다. 007 시리즈에서도 합을 맞출 다니엘 크레이그, 아나 드 아르마스 중심으로 이야기는 진행되지만, 나머지 배우들도 경쾌하게 제 몫을 해낸다. 크리스 에반스, 토니 콜레트, 돈 존슨, 마이클 섀넌, 캐서린 랭포드, 크리스토퍼 플러머 등 쟁쟁한 배우들이 각기 다른 매력을 뽐내면서 이야기의 몰입도를 한층 높인다. 분량은 적더라도 개성 강한 캐릭터들이 매끄럽게 단서 추적에 힘을 보탠다. 자신감을 넘어 오만함을 뽐내는 탐정 다니엘 크레이그는 중간중간 유머를 잊지 않고 무척 매력적인 캐릭터를 탄생시켰다. 한편 엄격, 근엄, 진지로 대표되는 캡틴 아메리카 크리스 에반스의 연기 변신도 인상적이다. "eat shit, eat shit, eat shit, definitely eat shit"을 외치며 가족들에게 공평하게(?) 안부를 묻는 불량배는 완전히 다른 사람 같더라. (촐싹거리며 춤을 추고, 과감한 언행으로 주목받는 평소 크리스 에반스와 더 잘 맞는 캐릭터 같긴 하다.)



요즘 외국 영화의 큰 이슈는 다름 아닌 번역이다. 군더더기 없는 각본도 오역이나 허술한 번역으로 의미가 크게 바뀌기 일쑤고, 요즘 같은 시대에 그냥 넘어가기에는 집단 지성이 가만있지 않는다. 센스 넘치는 (혹은 약 빤) 의역으로 유명한 황석희는 <나이브스 아웃> 흥행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었다. "저는 아름다운 패턴을 승리보다 우선하니까요", "아무런 편견 없이 사실들을 관찰한 후 포물선의 경로를 밝혀내고 종착점으로 유유히 가보면 진실이 내 발 앞에 떨어집니다."처럼 빛나는 대사들을 맛깔나게 살려낸 건 분명 번역가의 공도 크다. 게다가 슬쩍 지나가는 사소한 한 마디에도 복선이나 단서가 숨어있는 추리물이라면 그 역할은 일반적인 이야기 소개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각본, 연기, 번역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환상적인 하모니로 미스터리 추리물의 재미를 120% 느낄 수 있었다.


영화가 조롱하는 상대는 전형적인 21세기, 정확히는 트럼프 시대 미국의 단면이다. 백인 우월주의자, SNS 중독인 급진 우파, 이민자 혐오자 등 미국 사회에 현존하는 캐릭터들을 그대로 가져와 고풍스러운 미스터리물에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SNS, 스마트폰 중독인 손자 캐릭터는 <라스트 제다이>의 안티들에서 착안했다고 한다.) 가족이라고 남미에서 넘어온 마르타를 챙기고 포옹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산의 행방이 정해지기 전까지였다. 단숨에 돌변해 애초에 유산을 노린 나쁜 X으로 몰아가며, 협박하고, 회유하려는 유가족의 모습은 추함 그 자체였다. 감독은 영화 초반 범인을 공개하지만, 탐정이 범인을 찾아내는 과정 속에서 이들의 뻔뻔함과 차별주의적 시선을 낱낱이 담아냈다. 정치적 이념,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 편견과 혐오로 하나 된 세상. 이들에게 "진정 너희를 위한 길"이란 죽은 아버지의 뜻은 역시나 쉽게 전해지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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