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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샘바리 Dec 12. 2019

눈이 아닌 온몸으로 광활한 우주와 마주하다

[영화] 그래비티 (Gravity,  2013)


○ 시각과 청각을 사로잡는 황홀한 우주. 중력이 없는 공간에서 탄생한 <그래비티>


Don't let me go.


새까만 바탕에 점 하나 크기의 조난자가 떠 있는 포스터는 단숨에 나를 사로잡았다. 개봉 전 여러 평론가의 호평과 시사회에서 극찬에 가까운 평을 들었기에 기대가 컸다. 그리고 IMAX 대형 스크린으로 봐야지 시청이 아닌 진정한 체험의 단계를 겪을 수 있다는 이야기에 왕십리까지 달려갔다. 기대가 컸지만, 실망은 없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차분하게 묵묵히 빚어낸 우주의 아름다움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간결하고 담백한 시나리오, 그리고 그를 담담하게 그려낸 산드라 블록. 개인적으로 IMAX의 진수로 평가받는 <아바타> 보다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거대한 우주를 담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한 IMAX 스크린이었지만 까만 바탕에 별빛만 반짝이는 순간을 조금이나마 느끼기엔 제격이더라.


넓은 우주 한복판에 홀로 남겨진 한 명. 재난 영화 그래비티의 주인공은 닥터 스톤(산드라 블록)이다. 스토리는 무척 단순하다. "지구로 무사히 돌아오라." 딸을 잃고 무의미한 인생을 살던 닥터 스톤은 우주에서 임무 수행 중 대형 사고와 맞닥뜨린다. 러시아가 위성을 폭파한 잔해물이 강력하게 우주를 떠다니고, 그 잔해물들이 재앙이 되어 우주비행사들을 덮친 것이다. 베테랑 우주비행사 매트(조지 클루니)마저 초반에 도움을 주다가 결국 그녀 곁을 떠난다. 나사와의 교신도 끊어지고 우주를 떠다니는 닥터 스톤은 잔인한 고독감과 싸운다. 혼자라는 사실은 어떤 요소보다 파괴적인 위협이다. 제트팩을 이용해 위성을 향해 발버둥 치고, 결국 지구로 돌아가기 위해 애쓰는 사투는 하나의 대서사시에 가깝다.



○ 외계인, 러브라인 없이 롱테이크만으로 빚어낸 우주의 참모습


"관제센터 휴스턴의 분량을 잘라낼 것, 미사일 공격을 받게 할 것, 닥터 스톤의 과거를 알려주는 플래시백을 삽입할 것, 직접적인 적을 만들어 좀 더 역동적인 액션 장면을 연출할 것." 워너브라더스의 요구를 다시 보니 황당하다. 담백하고 묵직한 스토리라인이 흔해빠진 할리우드 권선징악 블록버스터가 될 뻔했다. 이를 거부하고 자신의 철학대로 영화를 끌고 나간 알폰소 쿠아론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지경이다. 걸작 '그래비티'에는 우주라는 공간에 절대 빠지지 않는 외계인을 찾아볼 수 없다. 남녀 주인공이 애틋한 사랑에 빠지는 뜬금없는 러브라인도 없다. (연애의 달인 조지 클루니라 혹시나 했습니다만 다행이다.) <그래비티>는 철저히 삶과 죽음이라는 두 키워드를 가지고 우주를 부지런히 그려낸 영화다.


황홀함, 아름다움, 낭만적. 혹은 공포, 고독함, 잔인함. 우주를 바라보는 상반된 시각이 동시에 영화 속에 녹아있다. 영화 초반은 반짝거리는 우주의 아름다움이 정점을 찍는다. 조지 클루니가 유영하며 지구를 바라보고 농담을 건네는 장면은 바라보기만 해도 뭉클하다. 무척 차분하고 조용한 우주라는 공간은 온갖 말썽이 벌어지는 지구와 대비되며 낭만적인 장관을 연출한다. 반대로 본격적으로 파편이 날아오기 시작하며 우주는 무한에 가까운 깊이와 넓이를 무기로 닥터 스톤을 공격한다. 본격적으로 재난이 시작되면 우주는 걷잡을 수 없이 차갑고 무서워진다. 한편 이런 우주의 특성을 담아내는 주 무기는 '롱테이크'다. 첫 쇼트부터 20분이 넘는 롱테이크로 진행되는 오프닝은 감독의 치밀함과 고집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장면 하나만으로 영화 전체의 메시지, 걸작이라 불리는 이유를 증명했다.



○ 시청이 아닌 체험의 경지에 오른 영화. 대단하다.


산드라 블록 이전에 원래 주인공은 안젤리나 졸리나 나탈리 포트만이 거론되었다. (잠시 상상해보면 강렬한 여전사 이미지의 안젤리나 졸리라면 극적인 귀환이 당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산드라 블록은 달콤한 로코물에나 어울릴 것이란 생각은 완벽한 오해였다. 불안과 공포에 흔들리는 초반부터, 희망을 잃고 흥분한 모습까지. 그리고 그녀가 무중력 상태에서 눈물을 떨어뜨리는, 아니 눈물을 둥둥 띄우는 장면은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몰입도가 높았다. 막판에 땅을 짚고 당당하게 일어서는 순간은 전율마저 일었다. 연약한 박사, 삶의 좌표를 잃은 무기력한 인간에서 당당히 두 발로 선 그녀는 아름답기보다 위대해 보이더라. '인셉션'에서 엔딩 크레딧이 시작되는 순간, '혹성탈출'에서 시저가 말을 하는 순간만큼이나 극적이고 놀라운 명장면이었다.


영화의 제목은 역설적으로 그래비티, 중력이다. 그녀는 지구에서 도피해 고요한 우주에 몸을 내맡긴 상태였다. 사랑하는 딸을 하늘로 보내고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던 그녀는 우주에서 떠다니는 존재였다. 하지만 재난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오히려 삶에 대한 생명력을 되찾았다. 자궁 속의 태아가 헤엄을 치고,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가 위태롭게 일어서듯이 그녀는 서서히 지구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자리 잡는다. 의사소통도 되지 않는 아닌가크(또는 아닌 강)와의 교신에서 그녀는 삶의 희망을 찾는다. 자장가를 불러주고, 강아지 울음소리를 들으며 애써 잊고 지냈던 타인의 존재를 재확인했던 것이다. <그래비티>는 결국 땅을 딛고, 중력과 맞서 싸우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하는 인간의 숙명을 그려낸 영화다. 인간은 지나고 나면 아무 일도 아닌 지구 상의 사소한 일에 스트레스를 받으며 신음한다. 그런 우리가 그래비티에서 펼쳐지는 최악의 재난에서 다시 일어서는 그녀를 보며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 같다.




https://youtu.be/OiTiKOy59o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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