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 시대의 정신승리
쓰지 않는 마일리지 적립 신용카드를 지갑에서 꺼냈다. 1,000원당 2 마일리지를 적립해주는 혜택을 최대한 받기 위해 월 50만 원씩 맞춰서 쓰며, 부지런히 과학적으로(?) 포인트를 바꾸고, 또 쌓아갔다. 하지만 마일리지로 끊은 5월 황금연휴 베트남, 여름휴가 프랑스 비행기표도 환불한 지 오래였다. 이게 다 빌어먹을 코로나 19 때문이었다. 때마침 독일에 사는 동생이 소소한 브이로그를 찍었다며 링크를 보내왔다. 어딜 가든 마스크를 쓰고, 최대한 집안에서 뚝딱뚝딱 요리를 해 먹는 건 나의 일상과 비슷했다. 하지만 딱 기분 좋은 햇살이 내리쬐는 온화한 날씨, 깨끗하고 맑게 우뚝 솟은 웅장한 산, 그리고 그 산을 비추며 너울거리는 호수는 완전히 달랐다. "장관이네요. 절경이고요. 신이 주신 선물이네요."란 멘트가 절로 나올 부러운 일상이었다. 우리 부부에게 짧더라도 이국적인 공간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 '해외여행'은 가장 강력한 피로회복제였다. 공항에서 느껴지는 북적거림, 떠나고 돌아오는 여정의 설렘과 여운을 좋아했다. 이런 우리에게 '해외여행'이란 단어가 코로나 19로 종말을 맞이한 건 꽤 충격적이고 슬픈 일이었다. 그래도 '굳이' 코로나 19로 인해 편안해진 부분을 떠올리며 정신승리를 시도했다.
사실 나는 적어도 결혼한 이후에는 국내 여행을 그리 즐기지 않았다. 일단 공항의 설렘을 느낄 수 없었고, 가까운데 비싸다는 바가지 이미지가 있었으며, 무엇보다 웬만한 로컬 맛집을 요즘에는 백화점에서 맛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운전을 피곤해하는 내 성향도 한몫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었고, 파리의 갓 나온 크로와상 대신 얼큰한 강릉 순두부 짬뽕을 기대했다. 목적지는 정선에 새로 생긴 리조트였고, 특이하게도 콘셉트가 '웰니스'였다. 바위, 암반을 뜻하는 프랑스어 '로쉬(Roche)'가 들어간 리조트에 들어서자 눈앞에 아름다운 산이 펼쳐졌고, 자연의 모습을 곳곳에 담으면서도 깨끗한 시설을 자랑했다. 우리는 많이도 먹었지만, 행복(Well-being)과 건강(Fitness)한 삶을 뜻하는 웰니스(Wellness) 요가 프로그램에 서툴지만 매일 참석했다. 걷고, 자고, 먹고, 운전하고(넓은 공터가 있어 장롱면허인 아내도 운전대를 잡아봤다.) 즐거운 마음으로 푹 쉬다 돌아왔다. 평화로운 자연을 온전히 느끼고, 지친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는 시간은 무척 뜻깊고 만족스러웠다.
딱딱 소리와 함께 손톱이 날아다니고, 에이취풔푸 재채기 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사무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스크는 필수다. 호흡기가 특히 약한 나는 매일 습관적으로 마우스, 키보드를 세정제로 닦고, 손을 여러 차례 씻고 온다. 마스크도 잠을 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커피를 마실 때를 제외하고는 절대 벗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청결을 위한 노력이 유난떠는 게 아니라, 당연한 시대다. 예전 같으면 은근슬쩍 눈치를 주고, 아예 대놓고 오버하지 말라고 말하는 분위기의 사무실이었다. 지금도 속으로는 유난 떤다 불편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적어도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다들 넘어간다. 깨어있는 하루의 절반, 아니 그 이상을 보내는 실내에서 마스크를 쓰고 있는 일은 꽤나 인내심이 필요한 노동이다. 귀가 얼얼하고 답답하고 덥지만 그런 불편함보다 건강을 걱정하는 내 마음이 편한 게 먼저다. 아마 코로나가 잠잠해지더라도, 사무실이 천지개벽 바뀌지 않는 이상 마스크를 쓰는 노동은 계속될 것이다.
코로나 19로 잃어버린 포기한 소중한 일상들은 여전히 너무나 그립고 안타깝다. 그에 비해 겨우 떠올린 장점들은 지극히 소소하고, 미미하며 평범하다. 하지만 코로나 이전(BC, Before Corona)과 이후(AC, After Corona)로 완전히 달라진 세상에서 나름의 의미를 찾아가는 노력은 필수적이다. 미처 몰랐던 국내 여행의 재미를 소중한 사람과 함께 나눴다. 가장 소중한 내 몸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눈치 보지 않고 할 수 있다. (실제 예전보다 잔병치레가 확실히 줄었다. 손 씻기의 위대함이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와 불확실한 '미래'에만 목매는 것보단, 차라리 '현재'의 소소한 행복을 찾아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아, 물론. 여전히 발리 정글 리조트에서 마사지받고, 망고를 먹고 싶다. 날씬했던(!) 예전 여행 사진과 영상을 돌려보며 대리만족해야겠다. 그리고 독일에서 잠시 돌아온 반가운 동생이 자가격리를 끝내면 원 없이 대하를 먹어야겠다. 일단 폭풍우를 뚫고 무사히 퇴근을 하는 게 먼저지만.
엄청난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소소한 편안함에 만족하는 요즘이다. 반복되고 사소한 일상이 무척 소중하다.
요즘 꽤 살만한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