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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바지를 입고 회사에 갔다.

by 샘바리
천둥번개에 깬 새벽, 창밖의 이미지는 딱 이랬다.(출처 : UNSPLASH)

기록적인 집중 폭우 뉴스 화면은 뭔가 다른 세상 같았고 생경했다. 평화롭게 태양이 떠있다가도 갑자기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긴 했지만, 내 일상에는 사실 큰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꿉꿉한 집안에서 넷플릭스나 돌려보는 상황에서 '호우'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요소 중 하나였다. 하지만 8월 6일, 목요일 그날은 달랐다. 알람보다 천둥번개 소리에 먼저 잠에서 깼다. 휴대폰을 보니 분명 5시 30분이었는데, 어두컴컴한 게 새벽 2시인줄 알았다. 뻐근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우고. 찬물로 씻으며 정신을 깨고. 평소처럼 옷을 고르려는데, 아무리 봐도 비가 장난이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빗물에 젖은 신발, 그리고 그 안에서 축축한 양말, 나아가 발목을 넘어 허벅지까지 흠뻑 젖어 무거워질 바지가 떠올랐다. 결국 아내의 추천대로 반바지를 택했다. 나는 비를 이유로 당일 연차를 낼 용기는 없었지만, 반바지에 크록스를 입고 출근할 용기까지는 생긴 7년 차 직원이었다.

이미 크록스는 첨벙첨벙 소리를 내며 흠뻑 젖었다.

창의성을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고 자유분방한 스타트업 기업 문화는 사실 글로만 봐왔다. 나는 가장 보수적이라는 제조업 회사, 그중에서도 눈치 보는 게 평균 이상이라 자부하는 부서에서 근무 중이다. 물론 최근 '혁신', '파격'을 외치며 자율좌석제, 자율복장제 등을 시행하며 엄청나게 변화하긴 했다. 하지만 수많은 인원들이 함께 만들고 이어온 '문화'는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더라. 다른 팀이나 1층 카페를 돌아다니면 무척이나 흔치 않게 자유로운 복장을 볼 수 있었다. (최근에는 축구 유니폼을 입고 다니는 직원을 보고 반가움과 놀라움을 동시에 느꼈다.) 하지만 내가 버텨온 이곳은 달랐다. 언제 외근이 생길지 모른다며 풀 정장+넥타이가 공식이었고, 콤비를 입은 직원에게 지적(혹은 일침, 나아가 막말)하는 걸 눈앞에서 봤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눈치'가 팀컬러인 팀의 소심한 주니어인 나에게 남들은 너무나 당연한 '반바지'가 엄청난 도전이었다.

조용히 크록스에서 최애캐 지비츠를 뺐다.
이야! 나는 다 젖었는데. 아이씨. 부럽다!


양심상 크록스의 너무나 귀여운 토이스토리, 스파이더맨 캐릭터 지비츠는 빼고 사무실로 걸어갔다. 긴장 반 설렘 반, 아니 솔직히 동료 눈치 9할, 반바지의 편안함 1할을 안고 자연스럽게 자리로 향했다. 그리고 반바지와 관련된 유일한 코멘트는 '부럽다'였다. 자기 자리에서 미니 히터로 골프 바지를 말리고 있던 선배는 반바지가 부럽다고 툴툴거렸다. 10시간 가까이 철저히 자리에서 내 맨다리를 숨길 필요도 없었고, 나와 마주친 동료들도 별다른 이야기도 없었다. 사실 그런 툴툴거림도 모든 게 긴장의 연속인 신입사원이라면 눈치가 보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덧 그런 핀잔과 장난에 무뎌진 나는 자연스럽게 흘려듣고, 반바지의 편안함을 만끽했다. 그리고 사소한 복장의 변화로 깨달았다. 생각보다 타인은 나에게 관심이 없었고, 걱정보다 나는 타인을 신경 쓰지 않았다. 퇴근 인사를 돌던 중 뒤늦게 내 복장을 본 옆 팀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두근거렸던 내 마음은 어느덧 뿌듯함이 더 컸다. 거대한 골프 우산이 무색할 정도로 뜨겁고 화창한 날씨의 퇴근길이었다. 별다를 것 없는 뻔한 목요일이었지만 곱씹을 게 많았다.

회사 옆 산책길은 이미 물이 콸콸콸 넘쳐 흐르고 있더라.
어? 반바지? 오! 잘했어.


여기저기서 딱딱한 조직문화를 바꿔야 한다며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변화는 역시나 불편하고 어려운 일이다. 나 역시도 고작 2~3년 전의 일들이 먼 과거 같고, 예전이 더 힘들었다며 합리화하는 경우가 많다. 'Latte is horse'로 표현되는 옛날의 경험을 떠올리면 급변한 현재가 고깝지 않은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거의 그때 당시 맞았다고 하더라도, 지금 맞는 건, 옳은 건, 효율적인 건 아니다. 시간이 흘렀고, 상황이 바뀌었으며, 역사는 반복되더라도 정답은 달라졌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덧 조직을 구성하는 젊은 직원들도 많아졌다. 더 이상 조직에 만연한 불합리함에 혼자 끙끙 앓지 않는다. 옳고 그름의 영역이 아니라, 호불호의 영역에서도 싫으면 싫다고 이야기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요즘이다. 게다가 오직 구태의연한 '과거의 경험'에 기대어 내뱉는 쓴소리는 '꼰대'의 징표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반바지를 입는 것과 본인의 업무를 똑바로 잘하는 것. 아마 과거에도 복장은 지금처럼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다음에는 폭우가 아니라 무더운 여름날에 시원한 반바지를 입고 출근해야겠다. 기업문화의 혁신을 상징한다거나, 남의 눈치 안보고 당당하게 회사 생활을 하겠다.....는 거창한 계획보다는 사실 편안함이 우선이다. 컴퓨터 앞에서 시원하게 작업하는 건 물론이고, 요즘 회사생활 유일한 낙인 가벼운 점심 산책에도 딱이니 말이다. 다음 반바지 데이는 일단 모두가 즐거운 금요일이 좋겠다.


* 반바지를 입고 출근한 말복 D-1.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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